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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한 첫인상을 말해보라 하면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당시 생후 8개월 된 아기였기 때문이다. 처음 배에서 내려 중국이라는 낯선 땅에 들어왔을 때 나는 아마 엄마의 품에 안겨 흐리멍덩한 두 눈으로 생전 처음 보는 수많은 색깔과 다양한 냄새가 뒤섞인 ‘혼잡함’이라는 것을 신기한 듯 뚫어져라 쳐다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점을 무시하면 중국의 첫인상은 말 그대로 다른 나라였다.


그 인상은 아마 중국에 오자마자 겪었던 소위 ‘물갈이’라는 트라우마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아기였던 나는 온몸에 열이 나고 자꾸 설사를 해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후 한국인유치원에 들어가서는 친구들이 거짓말로 나를 밖에 내보낸 다음 방문을 잠그고 자기끼리 소꿉놀이를 한 기억이 난다. 당시엔 그게 고의였단 것도 심지어 거짓말이었다는 것도 인지를 못했지만 훗날 생각해 보니 그것은 일종의 따돌림이자 내가 느꼈던 첫 소외감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두 번 다녔는데 첫 초등 1학년은 상해한국학교에서 보냈다. 이때의 기억은 대체로 행복했기에 지금까지도 반짝이는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남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나는 한 학기밖에 다니지 못했고 1년 뒤에 현지 학교에 1학년으로 다시 입학했다. 그리고 우습게도 초등학교를 두 번 입학한 나이가 된 그해, 중국에서 8년을 보내고서야 나는 ‘내 나라’가 아닌 낯선 언어를 쓰는 낯선 땅 즉 외국에 살고 있다는 걸 완전히 이해했다.


중국 아이들의 눈에는 자기가 말을 걸어도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던 내가 이상했을 것이다. 반면 나도 그전의 한국학교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나는 학교의 엄격한 규율들을 따르려 애썼다. 매일 아침 체조를 하고 중국 국기를 향해 경례를 했으며 중국 사자성어와 시를 외우면서 다른 아이들과 비슷해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애들은 마치 옛날 봉건주의 시대의 그들 조상처럼 이방인인 나를 거부하고 고립시켰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그런 분위기는 점차 사그라져 갔지만 그때의 기억은 희미해질지언정 평생 내 뇌리에 박혀 있을 것이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이 5학년 때 있었다. 당시 담임은 연세가 지긋한 여선생이었는데 시험을 보면 항상 성적 순위를 아이들에게 알려줬다. 어느 날 난 수학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 어린 나는 책상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내 이름이 불리길 잔뜩 기대했는데 선생님은 입술을 삐죽이며 마치 내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마냥 마음 상한 표정을 짓더니 바로 내 다음 순위의 이름부터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내 뇌가 ‘찰칵’ 하는 소리를 내며 카메라 셔터를 누른 것처럼 그 순간은 ‘멍하니 선생님을 바라보는 나와 그런 나를 무시하곤 아무 일 없다는 듯 나머지 이름을 불러 내려가는 선생님’ 이라는 장면으로 내 기억 속 한 공간에 각인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한동안 교탁 쪽을 지나가거나 선생님을 마주 보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이렇듯 친구 몇 명 사귄 것 빼고는 나의 어린 시절은 웃으면서 얘기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나는 한참 후에야 그런 부당한 대우들이 외국인이라는 이유에 근거를 뒀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걸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철이 들었을 때 나는 중국이 나를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든 이곳을 떠날 수 있다며 모든 미련을 버렸고 초연한 마음으로 중국을 밀쳐냈다. ‘여긴 그냥 다른 나라 언젠간 떠날 곳이야’라면서.


v그리고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지금 내가 다니는 국제학교로 옮겨왔다. 중국 학교에서 현지 아이들하고만 공부를 하던 나로서는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이 모여 수업을 듣는다는 사실이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국제학교의 특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직접 체험해 보니 너무나 다른 세계였다.


비록 몇 명 없었지만 한국 친구들 -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한국 친구를 사귀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내가 항상 갈망해오던 한국의 느낌이랄까 나의 그리움을 충족시키기 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 도 있었다. 서툴지만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한국 친구들에게 다가갔고 곧 우리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처음으로 노래방도 가보고 스티커 사진도 찍어보고 친구 집에 놀러 가보면서 나는 내가 완전한 한국인이 된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러던 중 친구들은 가끔씩 내가 10년 넘게 중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비꼬듯이 말해 나의 환상에 금이 가게끔 했다. 짓궂은 남자애들이 나를 ‘짱깨’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참다 못해서 화를 터뜨리기 전까지 모든 한국 친구가 따라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었는데 당시 나에게는 ‘중국인스러움’이 가장 심한 욕이었다. 나름대로 ‘한국인스러워’지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기에 ‘짱깨’라는 별명은 실로 엄청난 타격이었다.


나는 모르는 한국 단어가 있거나 맞춤법이 틀리면 부끄러워했다. 중국에 오래 살아서 모국어도 까먹어버린 멍청이라고 누군가가 내 귓가에 속삭이는 느낌을 받았고 실로 옆에 누군가가 있으면 말로는 안 해도 그 두 눈이 나한테 그런 비난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자존심과 고군분투하며 나의 사춘기가 지나갔다. 많은 한국 친구와 교류를 해보고 나서 인성은 나라를 따지지 않는다는 자명한 이치를 깨달았다. 한국인이면 무조건 친해지고 보려는 생각은 오산이었고 중국인은 다 나를 싫어한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편견이었다.


법정 스님이 생전에 하신 말씀을 책에서 읽고 큰 깨우침을 얻은 적이 있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 탓. 굳게 닫힌 마음을 활짝 열린 마음으로 바꾸지 않는 한 새로운 눈은 열리지 않는다.”


이 한마디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파동을 일으켰고 그 전율은 심장을 가로질러 올라와 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지금까지 색안경을 끼고 있었던 건 주변이 아니고 나였고 주위 사람들까지 힘들게 했던 장본인 역시 바로 나였던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초등학교 시절의 중국 친구와 선생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나에게 잘못을 했지만 나는 그것을 따지지 않으리라.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고난과 역경이 있기 마련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결국엔 전화위복이 되어 더욱 성숙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지름길로 인도해주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중국 국기에 경례를 하기 싫어했던 어린 나, 한국 친구들한테 쭈뼛쭈뼛 다가가던 나, 무언가에 쫓기듯이 국어사전을 펴놓고 공부하던 나, 또 지금 한국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교 2학년인 나.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은 나는 앞으로도 수많은 걸림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갈 길이 멀다. 오늘도 나는 하루 단위의 인생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 끝이 없어 보이는 이 여정을 성실하게 완수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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