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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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문학

 

현장의목소리


나는 1992년 10월 정든 산천 내 조국을 등지고 달랑 이민 가방 하나를 들고 비행기를 타기 한 달 전에 과테말라라는 나라가 있음도 처음 알았다.


하루를 꼬박 걸려 도착한 공항은 대한민국의 어느 한산한 시골 역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주 초라해 한눈에 개발도상국임을 알 수 있었다.


한국인 동포는 500여 명으로 대부분은 섬유 관련 업체에 종사했고, 어디서 만나든 고국에 두고 온 일가친척을 만난 것처럼 동포애가 물씬 풍기는 만남이었다.


단 한마디 인사말도 잘 못할 정도로 언어의 장벽을 가진 채로 한의원을 열었던 당시의 그 힘든 고생을 지금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의원을 열고 하루에 한두 명씩 찾아오는 동포 환자로 외로움과 향수를 달래며 틈나는 대로 스페인어를 배웠다. 그렇게 숨 가쁘게 6개월을 보내고 나니 신체 명칭이나 병명 정도는 현지어로 말할 수 있게 돼 조금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용기를 내어 원주민도 진료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너무도 가난한 사람이 많음을 알게 됐고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이곳에도 분명히 불쌍한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병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돼 원주민들에게 의료봉사를 하고 싶다고 밝히자 수도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소도시 안티과에 있는 엘마노 페드로라는 무료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그 즉시 병원을 찾아가 원장인 신부에게 의료봉사를 하고 싶다고 하자 너무도 좋아하면서 병원 직원을 소개해 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의료봉사를 7년을 넘게 했는데 보람이 매우 커 과테말라에 오게 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봉사를 한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 현지 미국 대사관에서 여권을 제출하라고 병원으로 연락이 왔고 엉겁결에 보냈더니 신청도 안 한 미국 비자를 발급해주었다. 별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었는데 영문도 모르고 비자를 받았다. 알고 보니 병원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나의 봉사활동을 알리는 글을 보낸 덕분이었다. 이 병원은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막대한 원조로 500여 명의 중환자를 치료하는 곳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과테말라 원주민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나는 이곳을 고국처럼 따스하게 느끼고 사랑하게 돼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돌이켜 보면 지금도 당시 봉사를 시작한 것이 참 다행이다 싶다. 만약 돈 버는 일에만 치중했다면 나는 향수병을 이기지 못하고 벌써 고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물론 나는 내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며 내 동포를 사랑한다.


내가 봉사한 일을 자랑하자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성경에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듯이 나는 이를 자랑한 적이 없지만 이렇게 밝히는 것은 이곳에서 이민 생활의 한 가지 철칙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이민 생활을 새로 시작하려는 동포나 힘들어 이민을 접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주제넘게 꼭 한마디 조언하고 싶다.


어느 곳을 가든 그 땅과 그곳에 사는 현지인을 사랑하며 포근한 마음을 가지면 고국에 대한 향수는 저절로 치유되고 마음도 편안해져 만사형통할 것이라는 점이다. 나 또한 가난하고 질병에 시달리는 그들에게서 사랑을 배웠고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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