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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문학


9살이 되던 새해 첫 날, 나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다. 4살 때 중국에 온 나는, 9살이 되면서 한국에 살았던 시간보다 이곳에서 있는 시간이 더 많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나보다 5살 많은 형과 3살 많은 누나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형과 누나는 한국에서 살았던 날이 나보다는 많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 혼자 중국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에 빠졌다. 모두 ‘희망찬 새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슬픈 새해였다.


11살이 된 지금, 난 아직도 중국에 산다. 한국보다 중국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많지만, 나는 여전히 한국 사람으로 살고 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은 언제나 변하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진짜 기뻤다. 혹시 한국인이 아니면 어떻게 될까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 아마 모를 것이다. 나는 한국인이라는 것이 참 좋다. 이유는 정말 많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을 때가 더욱 그렇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항저우다. 나는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잘 몰랐다. 그런데 얼마 전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보고, 또 항저우 임시정부에도 가보고 나서 궁금한 것이 생겼다. 우리나라 정부가 왜 ‘임시’라는 이름으로 두 개나 있어야 했는지 말이다.


형과 누나는 내게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는 외국 기관들이 많아서 우리나라가 외교 활동하기 편해 그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다고 알려줬다.


여러 독립운동가들 모두는 존경할 만하지만 나는 특히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를 좋아한다. 나는 ‘백범일지’라는 김구 선생님의 책을 읽었는데,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가 마지막 아침 식사를 함께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세상에서 1시간 이후에 필요 없는 윤봉길의 시계를 받은 김구 선생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다.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에서 폭탄을 던진 일로 상하이 임시정부는 피난을 가야 했다. 그래서 1932년에 임시정부가 항저우로 옮겨왔다. 대한임시정부는 서호 주변에 큰 건물과 화려한 백화점들 사이에 있다. 나는 이런 곳에 우리나라 임시정부가 그대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중국에서도 우리의 독립정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임시정부는 중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자랑이다.


임시정부에 가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한국 사람은 바닥이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데, 난방도 안 되는 이런 방에서 생활하는 게 좀 많이 쓸쓸하고 힘들었을 것 같다. 김구 선생님의 방은 작고 햇볕도 잘 안 드는 방이었지만 그래도 김구 선생님은 이곳을 좋아했을 것 같다. 작고 허름해도 대한민국이 살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임시’는 ‘잠깐’이라는 말이다. 나중에는 우리의 영원한 정부를 만들겠다는 뜻이 느껴졌다. 그렇게 계속 옮겨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이 괴롭혀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일본에게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계속 있었고, 1945년에 대한민국은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해방됐다.


중국의 가장 유명한 인터넷 사이트 ‘바이두(baidu)’가 있다. 우리 가족은 거기에 김구 선생님의 사진이 잘못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두희’ 설명과 이름 아래 김구 선생님의 사진이 있었다. 우리 형제는 힘을 합쳐 바이두에 편지를 썼다. 바이두에서는 결국 잘못된 김구 선생님의 사진을 내려주었다. 나도 우리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할 거다. 나도 이런 독립운동가들처럼 대한민국을 빛내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내 꿈이다.


임시정부도 작고 우리나라도 작지만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꿈과 마음은 컸던 것 같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정말 훌륭한 분들이다. 그들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있을 것이고, 나는 죽을 때까지 한국 사람으로 사는 것을 행복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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