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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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젊은이 121명이 1902년 12월 22일 인천 월미도 해상에 정박한 일본 선박 겐카이마루(玄海丸)에 몸을 싣고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신체검사에 탈락한 19명을 제외하고 102명이 미국 상선 게일릭호로 옮겨 타고 이듬해 1월 13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했다. 오랜 여정으로 건강이 악화된 9명이 되돌아가고 93명만이 오하우 섬의 모쿨레이아 사탕수수 농장으로 투입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이민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차이나타운을 형성해 미국인 상권을 위협하는 중국인과, 파업이 잦은 일본인을 대신할 노동력을 한국에서 찾았다. 대한제국 조정도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터에 농장주들의 부탁을 받은 주한 미국공사 호러스 알렌이 건의하자 노동력을 수출하기로 했다. 고종은 미국인 사업가 데이비드 데슐러에게 모집과 송출 업무를 맡기는 한편, 출입국 업무를 전담할 수민원(綏民院)을 궁내부에 신설했다.


주요 도시의 기차역, 항구, 시장 등에 이민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붙었으나 당시 한국인에게 수만 리 떨어진 태평양의 외딴 섬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데슐러의 부탁을 받은 인천 내리교회 선교사 조지 존스는 하와이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비유하며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첫 승선자 가운데 인천 출신이 86명이고 그중에서도 내리교회 신도가 50여 명이었다. 게일릭호를 시작으로 1905년 8월 8일 도착한 몽골리아호에 이르기까지 하와이 이민선들은 56회에 걸쳐 7천226명의 한인을 하와이에 내려놓았다. 신체검사에 불합격한 479명을 뺀 실제 이민자는 6천747명이었다.


일본은 하와이 일본인 노동자들의 세력이 위축될 것을 우려해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그러자 고종은 이민 금지령을 내렸다.


신랑감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건너간 한인 ‘사진 신부’ 950명 달해


  하와이는 한인 이민자들이 꿈꾸던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매일 12시간 동안 억센 수숫대를 잘라야 했고, 말도 통하지 않는 농장 감독자들의 비인간적 처우와 부당한 횡포에 시달렸다. 그래도 이들은 한인교회를 세워 공동체 결속을 다지고, 피땀 흘려 번 돈을 쪼개 독립자금에 보탰다. 1908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노동자 출신 전명운·장인환 의사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것도 항일 열기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하와이 한인사회는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대부분 혼기를 넘긴 총각이었으나 결혼할 길이 막막했다. 당시 미국에는 동양인과의 결혼을 막는 금혼법이 존재한 데다, 결혼하러 모국을 다녀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농장주들은 음주·마약·범죄에 빠지는 노동자들이 생겨나자 작업 능률을 높이고자 사진 중매결혼을 권장했다. 하와이 주 정부도 신부들의 입국을 허가했다. 모국 처녀들은 중매쟁이 권유에 따라 신랑감 사진만 보고 편지로 결혼을 약속한 뒤 하와이 땅을 밟았다.

  일명 ‘사진 신부’는 1910년 11월 28일 입항한 목포 출신 최사라를 시작으로 동양인배척법이 제정된 1924년까지 950명에 이르게 된다. 이들은 사진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신랑의 모습에 실망하고 열악한 생활환경에 낙담했다. 그러나 고향에는 이미 결혼했다고 알려진 데다 되돌아갈 뱃삯도 없어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와이 이민자들이 가정을 이루자 한인 공동체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남편들이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 아내들은 삯바느질과 빨래 등으로 생계를 돕고 2세들을 길렀다. 아이가 자라면서 학교도 속속 생겨났다. 한인들은 대륙으로도 진출해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로부터 110년이 지나는 동안 재미 한인사회는 엄청난 양적 성장과 질적 발전을 이뤘다. 2019년 외교부 집계에 따르면 재미동포는 254만6천982명이다. 이전에는 중국에 이어 두 번째였다가 1위로 올라섰다. 미국 안에서도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재미 한인사회가 2세, 3세, 4세로 내려가며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뿌리가 되었던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의 헌신 덕분이다.

게일릭호 하와이 도착한 1월 13일 ‘미주 한인의 날’로 기념

  2003년 1월 13일에는 100년 전 게일릭호의 하와이 도착을 기념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미주 한인이민 100주년기념사업회는 그해 5월 9일 ‘미주 한인의 날’(The Korean American Day) 제정을 결의했다. 기념사업회를 토대로 출범한 미주한인재단은 제정안을 각계에 청원했다. 2003년 10월 22일 로스앤젤레스 시의회와 2004년 1월 12일 캘리포니아 주의회에 이어 2005년 12월 13일과 16일 연방 하원과 상원은 차례로 제정 법안을 통과시켰다. 한인들이 미국 건설에 기여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미국 각지에서는 새해들어 한인 이민 117주년을 맞아 제15회 미주 한인의 날 기념행사가 펼쳐졌다. 미주한인재단은 1월 14일 워싱턴DC 연방하원의원회관 레이번 빌딩에서 기념축전을 열었다.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이날 ‘미주 한인의 날 기념 결의안’을 채택했다. 한인 1.5세 최석호 주 의원 등이 발의한 결의안에는 1903년 한인 102명의 하와이 이민으로 시작된 미주 한인 이민사를 소개하고 한인들이 미국 사회 각 분야에서 주요 구성원으로 발전에 기여해왔다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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