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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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함성은 이른바 제국(帝國)의 약육강식 논리에 갇혀 신음하던 세계인들의 혼을 흔들어 깨운 ‘죽비 소리’였다. ‘견고한 둑’처럼 느껴졌던 일제의 엄혹한 보도통제와 교묘한 ‘프레임’ 조작도 결국에는 소용이 없었다. 대한독립을 만방에 알리고 함께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자는 한민족 전체의 일치된 호소는 서서히 지구촌 전체로 타전되며 세계 곳곳 식민지 민중들을 일으켜 세우는 ‘울림’이 됐다.


3·1운동 당시 아시아 소식을 전하는 외신 특파원들의 주(主) 거점은 일본 도쿄(東京)였다. 그러나 3·1 운동이 일어난 초기 도쿄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잠잠했다. 일차적 보도를 시작한 일본 언론이 3·1운동을 ‘단순 폭동’으로 매도한 총독부 발표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일본 정부가 나서 특파원들의 보도를 통제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아사히신문 1919년 3월 3일 자에는 고종의 장례식 사진과 함께 3·1 운동 관련 소식이 처음 등장하는데, 기사 제목은 ‘야소교도(기독교도) 조선인의 폭동’이었다. 요미우리는 3월 7일 자에서 ‘조선에 넘쳐나는 학생 소동(騷動) 중대(重大)’라는 제목으로 고종 장례식에 맞춘 학생 행진 소식을 전했지만, 그 후로는 3월 내내 3·1운동 관련 기사가 거의 없었다.


상하이서 첫 타전… ‘동병상련’ 中언론 “부끄럽다” 전폭지지


  3·1운동 관련 외신보도의 첫 물꼬를 튼 곳은 우리 독립운동의 산실과도 같은 중국 상하이(上海)였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사흘 뒤인 3월 4일 상하이 영문 대륙보에 독립운동을 위해 한국인들이 일제히 봉기했다는 소식이 실린 것이다. 이는 3·1운동이 영어 기사로 세계인들에게 알려진 첫 계기가 됐다. 이어 한국에서 온 독립운동가들로부터 ‘독립선언문’을 입수한 중국 언론은 3·1운동에 대한 동정적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국민당 기관지 민국일보는 3·1운동과 독립선언 사실 보도에 이어, 익명의 한인 여학생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독립 호소 편지 전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3·1운동 소식이 국제여론의 주 무대였던 미국에 당도한 것은 3월 10일이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진행된 3·1 운동과 민족대표들이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진행한 독립선언식이 있은 지 꼭 9일 만이다. 당시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미국 내의 독립운동 거점이었던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로 발송된 전보를 인용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한국은 파리평화회의에서 독립국임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한국은 이미 3월 1일에 주요 도시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일본의 통제로 그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내용으로 한국의 반일 저항 운동 소식을 일제히 지면에 실은 3월 10일 자 미국 신문의 3·1운동 보도는 확인된 것만 33건에 달한다. 3·1 운동에 대한 현지 언론의 관심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UPI 통신의 전신인 유나이티드 프레스(United Press), ‘A.P. 나이트 와이어’ 등 뉴스통신 기사를 인용한 당시 신문들은 3·1운동의 실체를 비교적 상세하게 지면에 반영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한국의 독립선언서를 처음 보도했다. 또 오클랜드 트리뷴은 ‘한국이 전 세계에 독립 지지를 요청했다’,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는 ‘3월 1일 일본의 한국 지배 종료 선포’, 호놀룰루 스타-불리틴은 ‘한국인들이 독립을 외친다’ 등의 헤드라인을 뽑았다. 지면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일본이 3·1운동 소식의 외부 전파를 막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감시와 경계를 폈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



일본 식민통치 지켜봤던 미국인 판사 “3·1운동 발생 자체를 믿을 수 없다”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 카운티에서 발행되는 산타아나 레지스터는 “일본의 무선, 전신 통제 때문에 (독립) 선언 소식의 발이 묶였다”는 대한인국민회 고위 관계자의 설명을 기사에 반영했다. 엄혹한 식민통치를 직접 지켜본 미국인 판사는 3·1 운동 발생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일제의 통제가 극심했다는 뜻이리라.


호놀룰루 스타-불리틴은 3월 11일 자 지면에 한국에서 7주간 적십자 활동을 한 적이 있는 존 A. 매슈먼 판사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는 “한국과 일본에 가본 사람으로서 일본이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시도를 허용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여러 이유로 한국인들이 독립선언을 했다는 상하이발 기사를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어쨌든 상하이발 전보 한 통으로 한국의 독립 선언과 반일 시위 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서서히 퍼져나기 시작했다.


한국의 3·1운동이 미국 주요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유럽으로 보도가 이어졌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3월 19일 자에 고종 황제 장례식날 불이 붙은 전국적인 독립운동 소식을 상하이발로 전했다. 그리고 일본이 한국의 독립운동 보도를 막고 있으며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는 내용을 각각 도쿄와 오사카발로 전했다. 다만,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에서는 3·1운동 보도가 단순 사실을 전하는 수준에 그쳤다.


독일(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프랑스(뤼마니테) 이탈리아(코리에레 델라 세라) 등 그 밖의 유럽국가 언론도 3·1운동 관련 소식을 사실 보도 중심으로 전했고, 러시아의 대표언론인 프라우다와 이즈베스티야도 3·1운동을 통한 한국의 독립운동에 주목했다. 이어 중남미의 브라질(에스타두)과 멕시코(엘 푸에블로), 동남아시아의 싱가포르(더 스트레이츠 타임스) 언론의 지면에도 3·1운동 관련 소식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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