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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광장

 

유공동포

홍범도 장군(1868∼1943)은 일본군에게는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려운 존재였고, 동포들에게는 ‘백두산 호랑이’로 불릴 만큼 추앙받았다. 독립운동사의 가장 빛나는 업적의 하나인 봉오동 전투는 그의 주도로 승리했다.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해 큰 몫을 담당했다. 평양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8살 때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작은아버지 집에 살다가 남의 집 머슴살이도 했다. 15살 때 평안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했으나 군대의 비리를 목격하고 병영을 뛰쳐나온다. 그 후 제지공장 노동자와 금강산 신계사 승려를 거쳐, 산짐승을 잡는 포수 노릇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이듬해 을미사변을 계기로 항일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그는 1895년 11월 강원도에서 포수와 빈농 40여 명을 규합해 의병부대를 꾸렸다. 1904년 가을에는 함경도 북청의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했고, 1907년과 1908년에는 함경도 일대에서 수십 차례 게릴라전을 벌여 일본 군경을 무찔렀다.

  1908년 11월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고 1910년 6월 우수리스크에서 결성된 13도의군에 참여했다. 1919년 5월 대한독립군을 창설한 뒤 8월 함경도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용맹을 떨쳤다. 3·1운동 후 만주와 연해주에서 편성된 독립군 부대가 벌인 최초의 전투였다. 이후로도 혁혁한 전공을 올려 기세가 하늘을 찔렀으나 병참과 무기 부족에 시달리는 고민을 해결하고자 대한국민회 산하로 들어가 대한북로독군부의 사령관을 맡았다.

  1920년 6월에는 일본군 19사단 예하 추격대대를 궤멸시킨 봉오동 전투를 이끌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가 157명으로 되어 있지만, 홍범도 일지에는 일본군 310명을 사살한 것으로 적혀 있다. 독립군 사망자는 4명에 불과했다. 10월 보복전에 나선 일본군 대부대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합세해 무찌른 것이 청산리 전투다

  홍범도는 1923년 군복을 벗은 뒤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하던 중 1937년 11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됐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극장도 함께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홍범도는 밤에는 고려극장 수위, 낮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며 고려인으로서 말년을 지냈다. 두만강 일대를 호령하며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그도 세월은 이기지 못해 조국의 광복을 목전에 두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62년에 와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대한민국 해군은 지난해 4월 진수한 1천800t급 잠수함을 홍범도함으로 명명했다.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붙인 잠수함 이름으로는 안중근·김좌진·윤봉길·유관순에 이어 다섯 번째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희망한다고 밝혔고, 카자흐스탄 정부측은 홍 장군의 원만한 유해 봉환을 위한 협조를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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