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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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0분께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대만의 타이중(台中)시 중심 도로에서는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육군 대장 일행의 긴 차량 행렬이 지나고 있었다. ‘황족’(皇族)의 일원이자 군부 실력자인 구니노미야는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출병을 앞두고 전초 기지 격인 대만에 주둔하고 있는 군의 전비 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특별 검열사’ 자격으로 대만을 순시 중이었다. 구니노미야가 탄 차가 타이중 주(州) 도서관 앞 사거리 코너를 돌려고 속도를 줄였다. 그때 한 청년이 인파 속에서 달려 나오더니 구니노미야가 탄 무개차(無蓋車) 위로 순식간에 뛰어올랐다. 청년은 독을 바른 단검으로 일격을 가하려 했지만 구니노미야의 곁을 지키던 경호관에게 가로막혔다. 놀란 운전기사가 가속 페달을 밟아 차량이 멀어지자 청년은 손에 쥔 단검을 구니노미야를 향해 힘껏 던졌다. 날아간 단검은 구니노미야의 상체를 스쳐 지났다. 구니노미야는 찰과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듯했지만 이로부터 8개월 만인 이듬해 1월 복막염으로 사망하게 된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긋는 엄청난 거사로 평가돼”


  청년은 현장에서 군중들을 향해 “여러분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단지 조국 대한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다.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친 뒤 일본 군경에게 체포됐다. 당시 스물셋이던 청년. 그가 바로 한국 독립운동의 ‘4대 의사’ 중 한 명으로 손꼽히지만, 그간 우리나라에서조차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조명하(1905∼1928년) 의사다.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처럼 잘 알려지지는 못했지만 조 의사의 구니노미야 척살(刺殺) 시도는 당시 일본을 큰 충격에 빠뜨리고 대만을 뒤흔든 일대 사건이었다. ‘친왕(親王) 전하’라고 불리던 구니노미야는 일본이 신성시하던 ‘황족’의 일원이자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군부와 정계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실력자였다. 또 192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한국과 대만에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점차 약화하는 가운데 일본은 ‘문화 통치’를 통해 안정적인 식민지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따라서 조 의사의 ‘타이중 의거’는 일제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사건 직후 대만에서는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한동안 가무를 포함한 일체의 문화 활동이 금지됐다. 일본 정부는 민심 동요를 우려해 일본과 대만, 조선에서 한 달간 조 의사 의거 관련 보도를 일절 금지하는 보도 통제에 나서기도 했다. ‘타이중 의거’ 여파로 대만 총독이 경질되는 사태로까지 이어진 것은 한국의 의열 투쟁 사상 전례가 없는 결과이기도 했다.

  조명하의사연구회 회원인 김상호 대만 슈핑(修平)과기대 교수는 “구니노미야의 일본 내 위상, 일본이 받은 충격에 비춰볼 때 조 의사의 의거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긋는 엄청난 거사로 평가된다”며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과 더불어 ‘4대 의사’로 평가받아야 마땅하지만 의거지가 일본이나 중국 본토가 아닌 대만이라는 점에서 그간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측면이 있어 아쉽다”고 지적했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등을 지낸 조소앙이 쓴 독립운동가 공적 기록인 유방집(遺芳集) 등 자료에 따르면 조 의사는 황해도 송화군의 빈한한 집안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만을 졸업했지만, 독학으로 여러 외국어를 익히고 1926년 신천군의 서기로 채용될 정도로 명석한 청년이었다. 식민 체제에 순응해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였지만 수개월 만에 군 서기직을 걷어차고 갓 태어난 아들과 부인을 고국에 남겨둔 채 일본을 거쳐 대만으로 건너가 목숨을 버릴 각오로 의거에 나섰다. 유방집은 조국을 떠나던 조 의사의 심경을 이렇게 기록한다. “신천군 말단으로 봉직하며 더 이상 적들의 압력에 견딜 수 없자 과감하게 적의 수뇌를 암살할 것을 결심하고 1926년 홀연히 오사카로 떠났다.” 의거 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조 의사는 타이중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체포 직후 찍힌 사진을 보면 그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어 체포 및 조사 과정에서 심한 구타를 당했음을 짐작게 한다.

조 의사는 이후 타이베이(台北)형무소로 옮겨지고 나서 ‘황족 위해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28년 10월 10일 오전 10시, 조 의사는 타이베이형무소에서 순국해 스물셋의 불꽃 같은 짧은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사형 집행 전 형무소 관리들에게 “나는 이미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더 남길 말이 없다. 단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조 의사 후손 “대만 관광지 갈 때 잠깐만 할아버지 생각해 줬으면”


  타이중의 민간 역사학자 천옌빈(陳彦斌)씨는 “똑같이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한국인들은 이를 부득부득 갈 정도로 분노했고 조명하 의사는 심지어 목숨을 내놓고 구니노미야를 황천으로 보내려 했다”며 “존경스러운 일로 우리 대만인들이 깊이 생각할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조 의사의 장손인 조경환 씨는 “할아버지께서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의사이신데도 그간 한국에서 잘 기억되지 못했는데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억울하실까 하는 생각이 부쩍 든다”며 “‘꽃보다 할배’ 방송 이후로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대만을 찾아가는데 관광지나 맛집을 찾아가는 길에 잠깐만이라도 할아버지를 생각해준다면 더 바랄 일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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