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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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극동 시베리아의 중심도시 하바롭스크 시 인구는 61만여 명이다. 한반도 8배 면적의 하바롭스크 주에는 143만여 명이 살고 있다. 이 가운데 고려인은 8천15명(2017년 외교부 발표 기준)으로 민족으로는 네 번째로 많다. 재외국민은 영주권자 6명, 일반체류자 56명, 유학생 30명 등 모두 92명이다.


하바롭스크 거주 고려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사할린 출신 한인이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광복을 맞게 되었으나 사할린에 있었던 한인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통행증을 받아야만 이동이 가능했고, 그마저도 불가능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사할린 거주 한인에게 북한 국적을 주면서 북한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많이 회유하였고, 실제로 많은 한인이 북한으로 갔다. 1960년대 초반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한인들은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베리아 등 러시아 대학교로 진학하였고, 하바롭스크의 경우도 1960년대를 지나면서 사할린 출신 한인이 대거 사할린을 떠나 이주를 하게 되었다. 1970년대까지도 무국적자로 사할린에서 체류한 한인이 많았다. 그러나 무국적자의 자녀들이 대학진학 등이 불가능한 사실을 알고 자식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두 번째 부류는 1993년 당시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강제이주정책 사과문을 발표하고 연해주 재이주 정착을 펼치면서 중앙아시아 지역에 살던 많은 고려인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지역으로 돌아왔으며, 하바롭스크로도 많이 이주했다. 극동 러시아 거주 고려인은 1937년 시작된 스탈린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2년에 걸쳐 강제로 이주당했으며 그 수가 약 17만여 명에 달했다.

하바롭스크 고려인들은 빈부 격차가 크다. 사업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있는 반면에 2016년부터 시작된 루블화 폭락으로 인해 F-4(재외동포) 비자를 받아서 한국에 일하러 가는 사람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고려인들의 경우 3, 4세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어 구사에 문제가 있다. 부모들이 러시아어를 못해서 워낙 힘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를 고수해야 하지만 자녀의 미래를 생각하면 한국보다 러시아어를 강조하게 된 것도 한 이유다.

고려인단체, 전통문화 보전에 힘써… 한인회도 김장하기 행사에 고려인 초청

하바롭스크에는 고려인 단체인 ‘극동시베리아고려인단체협회’와 재외국민단체인 한인회가 있다. 극동시베리아고려인연합회 백규성(69) 회장은 “고려인들은 교육 수준이 높고 근면해 주 정부와 시 정부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선조들도 자랑스럽지만, 우리 후손들도 공무원, 주의회 의원, 대학교수, 의사, 기업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인으로 활약하고 있죠”라고 전했다. 극동시베리아고려인단체협회에는 이산가족협회, 노인회, 청년회 등이 소속돼 있다. 언어와 문화 등 전통을 보존해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과 다른 민족들과 교류 친선을 도모하는 게 주요 업무라고 한다. 설과 추석 등 명절에는 합동잔치를 열어 전통음식을 나눠 먹고 전통놀이를 즐긴다. 가장 큰 행사는 2차대전 종전 겸 광복절을 기념해 한국 국제휴먼클럽(총재 백은기)과 함께 꾸미는 고려인문화대축제다.


사할린 동포 2세로 건설사와 여행사 등을 경영하는 백 회장은 2004년부터 극동시베리아고려인단체협회를 이끌고 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극동협의회장을 지낸 이력도 있어 평창동계올림픽 단일팀 소식을 누구보다 기뻐했다.


하바롭스크한인회의 지해성 총무는 “하바롭스크는 겨울이 길어서, 한인 교회에서 김장할 때 고려인들과 하바롭스크 현지인들을 초청하여 김치 담그는 법을 알려주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설날에도 같이 윷놀이, 씨름, 한복입기 체험 등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 총무는 하바롭스크에도 한류 열기가 뜨겁다고 전했다. 지 총무는 스무 살이 되던 2008년 부친의 추천으로 하바롭스크에 유학 왔고 지금은 고려인 3세인 부인, 딸과 살고 있다.

하바롭스크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 아시아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을 만든 곳이다. 이동녕·양기탁·안공근 등 신민회 출신의 우파 민족주의자, 이동휘·유동열 등 좌파 민족주의자, 김알렉산드라·오하묵 등 한인 2세 볼셰비키 등은 1918년 3월 하바롭스크에 모여 조선혁명가대회를 열었다. 주요 안건은 한반도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몇 달 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의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 세력과 연대하자는 것이었다. 혁명 세력은 제국주의의 압제에 신음하는 약소민족의 해방을 목표의 하나로 내세우고 있어 독립운동가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하바롭스크를 무대로 한 사회주의 독립운동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18년 9월 하바롭스크가 백군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한인사회당 주역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백규성 회장은 “하바롭스크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못지않게 독립운동가들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인데 자취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면서 “시 당국과 협조해 사라져 가는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표지판을 만들고 젊은이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영웅담을 들려주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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