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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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일어나기 20여 일 전 일본의 수도 도쿄의 간다(神田)에서는 세계 역사에서 예를 찾기 힘든 ‘독립선언’이 행해졌다. 식민지시대 피지배국 민중들이 지배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감행한 ‘2·8독립선언’이다. 조선에서 일본에 건너온 유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외친 이 조선 독립의 함성은 곧이어 조국에서 펼쳐진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도쿄 독립선언이 발표된 1919년 2월 8일은 30년 만의 대설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눈이 내렸다. 당시 일본에 있던 한반도 출신 유학생은 678명. 조선 유학생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현 재일본한국YMCA회관)에는 도쿄의 모든 조선 유학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400~600명이 모여들었다. 1906년 조선의 기독교인들이 일본에 와 세운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은 망년회 등으로 당시 조선 유학생들이 자주 모였던 곳이다. 종교 단체인 만큼 상대적으로 일제의 감시가 느슨해 웅변대회가 자주 열렸고 이는 유학생들 사이에서 민족의식이 고취되는 계기가 됐다. 독립선언이라는 ‘거사’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1919년 1월 6일이었다.


웅변대회 중 독립을 열망하는 연설이 이어지다가 구체적인 행동을 하자는 제안이 나왔고, 최팔용(와세다대), 서춘(도쿄고등사범), 백관수(세이소쿠 영어학교) 등 10명이 실행위원으로 뽑혔다. 10명의 실행위원 중 1명이 질병을 이유로 사퇴하고 이후 이광수(와세다대) 등 2명이 추가돼 실행위원은 11명이 됐다. 당시 선언을 실질적으로 주도했고, 이후 독립가로 활동한 김마리아(도쿄여자학원), 황에스더(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등 여성들은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지는 못했다. 선언문은 당시 소설가로 이름을 높였지만, 후일 친일파로 변절했던 이광수가 작성했고, 일본어와 영어로도 번역돼 비밀리에 인쇄됐다. 드디어 2월 8일이 되자 선언문은 제국의회 의원, 각국 대사관, 내외신 신문사 앞으로 ‘민족대회 소집 청원서’와 함께 배달됐다. 이어 오후 2시, 선언문이 발표됐다.


‘평화의 샘물’ 사업, 한인 단체의 적극 지원으로 확산


당시 유학생들은 어떻게 ‘적(敵)’의 수도인 도쿄 한복판에서, 그것도 조선 땅에서보다 먼저 독립선언을 외칠 수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집결 장소가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이었고, 조선보다 일본이 오히려 경찰의 감시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당시 도쿄가 한성(서울)보다 외국의 소식을 접하기 쉬운 ‘국제도시’였던 것도 이곳의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 열망을 달아오르게 한 요인이다. 일본 유학생들은 당시 전 세계적으로 퍼진 민족 자결주의의 흐름을 먼저 파악할 수 있었고, 곧 열릴 파리 강화회의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릴 기회라는 사실도 일찌감치 알게 됐다. 유학생들은 당시 민본주의와 민주주의 개혁을 주창하는 일본 내의 흐름, 즉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영향을 일부 받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2·8독립선언문은 3·1독립선언서보다 더 강경하고 투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선언문은 “한일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우리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교란한다”면서 독립을 주창했다. 그러면서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일본에 대해 ‘영원의 혈전’(血戰; 피의 싸움)을 선언한다.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의 책임이 아니다”고 힘을 주며 무력투쟁을 할 것을 밝히기도 했다. 선언문은 이후 조선땅으로 전해져 3·1독립선언서의 기초가 됐고, 도쿄의 독립선언은 같은 뜻을 가진 조선인들에 용기를 줘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독립선언 발표한 YMCA는 세탁소… 기념비·자료실만 역사 지켜


도쿄 내 2·8독립선언의 흔적은 재일본한국YMCA회관(이하 도쿄YMCA회관) 앞에 세워진 2·8독립선언 기념비와 회관 한구석에 있는 2·8독립선언 기념 자료실 정도다. 독립선언이 발표됐던 장소인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이 있던 곳에는 현재 세탁소와 사무실 등이 있는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개인 소유의 건물이라 2·8독립선언과 관련한 어떠한 기념물도 없다.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불에 탔고, 현재의 도쿄YMCA회관은 여기서 도보로 10분가량 떨어진 곳에 새 보금자리를 잡아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


만세 외치다 끌려갔던 히비야 공원엔 ‘독도 도발’ 전시관


유학생들이 선언문을 발표한 뒤 밖으로 나와 독립을 외친 히비야(日比谷) 공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일왕의 주거지인 황거(皇居) 인근에 있는 히비야 공원은 독립선언 직후인 2월 12일과 24일 각각 100명과 150명의 유학생이 모여 만세운동을 했던 곳이다. 이들은 공원 내 소음악당 앞에서 만세를 외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히비야 공원 어디에도 2·8독립선언의 현장임을 알리는 기념물은 없다. 오히려 공원 한쪽에 있는 시세이(市政)회관에는 일본 정부가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며 억지 주장을 펴는 ‘영토·주권전시관’이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다. 100년 전 조선 유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조선 독립을 외쳤던 곳에 이런 전시관이 들어선 데에는 제대로 된 반성을 하지 않은 채 과거를 쉽게 잊어버린 지금 일본의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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