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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 부모님도 친구도 없는 낯선 마을에서 내가 견딜 수 있을까?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부모님의 직장으로 인해 상해에서 거주했다. 일 년에 한 번 건강검진 차원으로 일주일 간 한국에 다녀오는 일 외에는 일 년 내내 외국인 마을과 미국학교를 전전하는 일상이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 한 달간 중학교 2학년 학생들 열여섯 명을 선정해 윈난 성에 보내준다는 말을 들은 날, 생각할 것도 없이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프로그램 지원서를 제출했다. 위의 질문은 고려해 보지도 않은 채.

그저 무료한 일상과 학업에서 탈출하려는 방편이었던 윈난 여정은 공식적인 출발 다섯 달 전부터 내 일상을 압도했다.

삼 개월 간에 걸쳐 지역 문화와 역사를 스스로 공부하고, 한 달간 윈난에 있을 때 연구할 주제를 선택해야 했다. 학교를 떠나있을 동안 꾸준히 진도에 뒤처지지 않게 자율학습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시간은 놀랍게도 빠르게 흘러 9월에 신청서를 넣은 나는 이듬해 3월, 항상 함께 살아온 부모님을 떠나 반평생을 살아온 상해로부터 2천km 밖의 작은 마을 시조우로 떠나게 되었다. 동급생 15명과 지도 선생님 2명과 함께 공항에 내렸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내가 알던 중국과 완전히 상반되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푸른 하늘. 사방을 요새처럼 가로막아 시야를 가리는 붉은 산. 내 발 밑에 바다처럼 펼쳐진 유채꽃. 또 그사이를 비집고 나와 수줍게 얼굴을 내민 안개꽃.

우리의 숙소는 80년 전 지어진 가정집을 최근에 보수한 건물이었다. 4명의 다른 학생들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외동딸로 혼자 방을 사용했고, 그 흔한 캠프도 참여해 본 적이 없어서 이때가 처음으로 다른 이와 방을 공유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오래된 건축물인 만큼 방음도 끔찍하게 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16명 모두가 어디를 가든 종종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아침저녁으로 샤워하기 위해 줄을 서야 했고, 위층을 차지한 학생들의 발소리는 내 잠을 설쳤다.

덕분에 공동체 생활로 인해 다른 이를 배려하는 것이나 주변 환경에 내가 미칠 영향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처럼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아직도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습관들을 학습할 수 있었다.

15명의 학우와 한 달이란 오랜 시간 동안 가깝게 생활한 만큼 시시콜콜한 경험까지 함께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함께 참가한 친한 친구와 크게 다투고 학교에선 말 한번 섞어보지 않은, 즉, 낯선 사람이나 다름없는 학생에게 하소연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일도 있었다. 목소리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아이였는데, 그 순간에 옆에 앉아 있어 준 것만으로도 어찌나 위안이 되던지!

우리는 하루 중 한 끼는 숙소가 아닌 마을 식당에서 먹는 것이 필수였는데, 식당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중 마을 주민 분들과 말을 트는 일이 잦았다. 그 중 시장에서 알게 된 ‘리’ 할머니는 항상 나와 다른 학생들을 볼 때마다 직접 키우신 당근을 나누어 주셨다. 한때 검었을 머리카락은 한 올도 빠짐없이 희게 새어 마치 설화 속에 산신을 뵙는 것 같았다. 항상 즐겨 입으시는 푸른 상의는 실오라기 하나 터져 나오지 않고, 전신의 절반만 한 바구니를 채소로 가득 채워 머리에 이고 걸으시는 모습이 길가에 그 누구보다 꼿꼿하고 당당하신 모습이었다.

오랫동안 머문 상해에서도, 하물며 몇 년을 함께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마주친 사람에게 눈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드물었는데, 이 여행은 학생들의 친화력을 이상하리만치 상승시키는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은 물론이요 어떤 학생들은 길에서 보행자의 물건을 들어드리고 저녁 식사에 초대받기도 했다. 함께 참가한 학생들과 새로 쌓은 인연도 기억에 남지만, 상해로 돌아온 후 몇 달째 잊히지 않는 것, 가장 그리운 것은 마을 주민들의 따뜻한 인정이다.

그 동안 내 나라가 아닌 타지에 오랜 시간 동안 머물며 중국인에 대한 편견은 쌓이기만 했었다. 중국인은 시끄럽게 떠든다, 중국인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중국인은 신호등을 지키지 않는다, 중국인은 새치기한다, 중국인은 비도덕적이다 등등. 나는 말이 완벽히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위에 벽을 짓고 눈을 가리고 다닌 것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윈난에서 지낸 한 달간 나의 이런 편협한 견해는 깨끗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긴 여정 후 가장 아쉬움이 남았던 것은 마을 사람들과 더 친해지지 못한 점이다.

나는 웬만한 운동엔 소질이 없어 자전거 타기를 즐겼는데, 태어나서 그토록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당시 오후에는 바람이 세게 불었는데, 시원한 기류가 내 얼굴을 가로질러 갈 때 그 해방적인 느낌은 이루 설명할 수 없었다.

날이 좋으면 산 위에 아기자기하게 지어진 작은 마을들도 눈 안에 들어왔다. 마을들은 멀리서도 눈에 띄게 지역의 붉은 흙과는 상반되게 푸른 기와와 흰 벽을 자주 사용하는 건축 양식을 지녔다. 평소라면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기 바빴겠지만, 그런 일을 대비해 우리는 휴대전화라곤 십 년 전 노키아만을 소지하고 있었다. 2018년에 노키아를 들고 여행하는 중학생이라니! 휴대전화기가 없으니 강을 마주하고 딱히 할 일이 없어 멍하니 산 너머를 바라보던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주시한 현지인들이 생각난다. 그야말로 기이한 여정이라 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한 달간 좋은 일만으로 가득 찬 것도 아니었다. 일일이 따져보면, 유난히 행복했던 시간보단 그 어느 때보다 컸던 정신적 압력으로 인해 마음고생한 시간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한 달간의 극단적인 희로애락만큼 내 인생에 다시 찾아보기 힘든 기회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새벽에 몰래 살금살금 방을 빠져 나오면서 나를 맞이했던 저물어가는 별들처럼 이 경험의 소중함을 깨달았을 때는 기억이 퇴색되기 시작한 후였다. 그래서 더 간절히 가슴에 새기어 간직하려 노력한다. 한 번도 몰랐으면 좀 마음이 가벼웠을 것을, 적막한 상해 한복판에서 피폐한 삶에 다른 방식의 생활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 마을 시조우에 감사한다. 한밤중에 눈을 가리는 형광비색으로 빛나는 건물 사이에서도 적막함을 머리맡에 두고 살았던 나에게 푸른 산의 검은 그림자 아래서 고요함 속에 받은 위안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돌아온 지 두 달이 지난 후에도 무심코 자기 전 창 밖을 바라보면 칠흑 같은 하늘을 수놓아 밤을 밝히던 별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찌나 선명하던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미세하게 푸른색 붉은색 흰색으로 다르게 빛을 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윈난에선 사람 목소리보다 새 지저귀는 노랫소리를 더 자주 들었다. 자동차나 오토바이 바퀴보단 말발굽소리와 자전거 벨소리가 더 귀에 익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혀보다는 눈과 귀를 더 자주 사용했다. 그럼에도 내 일상은 더 흥미로운 대화, 더 단단해진 우정으로 풍요로웠다. 항상 사람 사이에 살아가며 사람을 그리는 나의 인생도 어찌 보면 하나의 길고 긴 기이한 여정이다. 그래서 짧게나마 고요하고 새로웠던 삶이 더 주옥같은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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