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12월호
특집/기획
화제
인물/역사
칼럼/문학
고국소식
재단소식
목록보기

특집/기획

 

기획


2018년 무술년(戊戌年) 새해가 밝았다. 개인과 가정의 행복, 한반도 평화, 경제발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 등은 새해를 맞는 740만 해외 동포의 공통적 바람일 것이다. 전 세계 한인사회 가운데 새해 일출을 가장 일찍 맞이하는 곳의 하나가 뉴질랜드이다. 한국 표준시간보다 3시간 빠르고 10월부터 3월까지 적용되는 서머타임 기간에는 한국과 4시간 차이가 난다.


뉴질랜드 남섬은 뉴질랜드를 이루는 두 섬 중 하나로 세계에서 12번째로 큰 섬(면적 15만 737km2)이며 영화 ‘반지의 제왕’ 촬영지로 더 유명해졌다. 세계적인 트래킹 코스 ‘밀포드’ 트랙이 이곳에 있다. 뉴질랜드 남섬에 발을 디딘 최초의 한인은 1972년부터 녹용 사업을 한 김경준 씨(작고)로 알려졌다. 당시까지 수출용 고기 용도 이외에 달리 활용가치가 없던 녹용을 가공해 수출하기 시작한 공로로 뉴질랜드 사슴농민협회는 1994년 김 씨에게 녹용 개척자 상을 수여했다. 그 후 이성방, 박경식, 김용관, 이연수 씨 등이 차례로 입국해 녹용 사업 규모가 크게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부터 크라이스트처치를 중심으로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녹용 사업에 진출한 교민은 2000년대 초만 해도 여럿 있었으나 자기들이 쓸모가 없어서 버리던 사슴뿔을 헐값에 매입, 가공해서 비싸게 수출하는 것을 보고 뒤늦게 돈이 되는 아이템이라는 것을 알아채린 농장주들이 제값을 받겠다고 나서고 협회나 정부 차원에서 각종 규제가 가해지면서 많은 교민 업체가 2000년대 초·중반 문을 닫았다.


 1980년대 중반에는 이준현 씨가 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1990년 이전까지 남섬 전역에는 50여 가구의 소수 한국인만 정착하고 있었으며 티마루를 중심으로 원양어업 업체들이 자리 잡고 선원들이 부정기적으로 들르는 정도였다. 이후 1980년대 말 투자이민 개방에 이어 1991년부터 이른바 점수제 이민이라는 뉴질랜드 정부의 새로운 기술사업 이민정책 실시를 계기로 이민이 본격화하면서 비로소 남섬에도 한인사회가 커지게 됐으며 소규모의 크라이스트처치 한인회도 1991년 출범했다.

당시 고국을 떠나온 뉴질랜드 이민자 대부분이 북섬의 오클랜드에 정착했고 그중 일부가 남섬 크라이스트처치를 새로운 삶 터로 정하면서 1990년대 중반부터 이곳 시내에도 리카턴 지역을 중심으로 식당과 기념품점 등 한인업소가 들어섰다. 이 시기에 한인교회도 생겨나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동포신문과 방송, 한국학교가 잇따라 문을 열었다.

1993년부터 뉴질랜드에 주 3회 취항한 대한항공 직항편 중 주 1편이 이듬해 7월부터 크라이스트처치까지 연장 운항에 들어갔고 한국 내 세계화 바람과 해외여행 붐에 편승해 뉴질랜드 남섬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났다. 1999년에는 뉴질랜드 정부가 장기사업비자 제도까지 도입해 또 한 차례 이민 붐이 불어 남섬 한인사회가 크라이스트처치뿐만 아니라 더니든 등 여타 지역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어학연수 및 조기유학 붐과 맞물려 유학생과 가족들도 많이 늘어나 2000년대 초 중반 무렵에는 남섬 전역에 크라이스트처치 4천~5천여 명 교민을 포함해 다른 지역 교민과 유학생, 가족, 워킹 홀리데이 젊은이들까지 합치면 1만여 명 가까운 한인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2011년 2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발생한 규모 6.3의 대지진으로 교민들이 오클랜드를 비롯한 타 지역으로 대거 이주했고 유학생들이 떠난 빈자리도 새로 채워지지 않으면서 현재는 거주 한인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크라이스트처치에는 한국해양연구원 부설 극지연구소 분원이 있고 대한민국 최초의 연구용 쇄빙선 ‘아라온’호가 매년 10월경 이곳에서 보급물자와 연구진을 남극 기지로 보내고 있다.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사회는 젊은 세대가 이끌어가고 있다. 이정은 회장은 1980년생으로 중학교 3학년 때 가족과 함께 이민 온 1.5세대이다. 이 회장에게 젊은 나이에 한인회장직을 맡게 된 배경을 물어봤다. “한인회 일을 하기 전까지는 다른 1.5세대 교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저 역시 솔직히 교민사회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재향군인회에서 개최한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인인 저 자신은 오히려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던 모국 한국에 대해 이분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오늘날 한국이 이만큼 발전한 데 대해 저보다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더군요. 그때 느꼈던 부끄러움과 이곳까지 와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이후 한인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이유가 됐습니다.”

크라이스트처치 한인사회의 과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이민 1.5세대로 살아오며 관찰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인사회의 일꾼이 될 세대인 젊은층과 자녀들이 더 좋은 기회를 쫓아 떠나는 경우가 많고, 이곳에 정착하더라도 언어나 문화면에서 이미 현지사회에 잘 적응한 만큼 한인사회와의 교류 없이 사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한인사회 미래를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많이 정착하고 한인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방안을 이민 1세대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퀵메뉴
  • 목차보기
  • 퍼가기
  • 인쇄하기
  • 탑으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