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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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문학


한국을 떠나 산지 10년이 넘은 지금, 내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건 살았던 장소도 특별한 사건도 아닌 사람이다. 내가 외국에서 한 일보다 중요하건 내가 만난 사람과 그들이 내게 끼친 영향이다. 한국, 네팔, 인도, 태국 등등 여러 나라를 다녔고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힘들던 때에 손을 내밀어준 친구, 위기에서 건져준 손길들, 그리고 늘 뒤에서 힘이 되어 준 사람들. 그 덕분에 오늘의 내가 있고 또 다른 추억거리가 생겼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과 만났고 모두가 내게 소중한 인연이었다. 이렇게 멋지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소통했다는 건 내게 큰 자랑이면서 감사한 일이다. 내가 만난 그들이 긴 타국 생활에서 얻은 재산이자 추억이고 또 그리움이다.퉁퉁 부은 눈으로 자기를 잊지 말라던 초등학교 단짝 다정이를 뒤로 한 채 머나먼 인도에 온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알파벳도 겨우 뗀 한국의 흔한 ‘초딩’ 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친구를 사귈 엄두는 당연히 내지 못했었다. 엄마 손을 잡고 가장 좋아하던 분홍색 미니마우스 치마를 입고 놀이터를 가도 생김이 다른 나를 보며 키득거리며 어느 누구도 다가와주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참 쉬웠던 “나랑 친구할래?”라는 말이라도 현지어로 할 줄 알았으면 더 다가가기 쉬웠을 거다. 외톨이처럼 보이는 게 싫어 엄마에게 집에 가자고 말하려던 참에 크고 까만 눈동자에 까무잡잡하고 아담한 아이가 다가왔다. “툼하라 남 끼야 해?” 아이가 말했다. 내 이름을 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엄마랑 연습했던 말이기 때문이기에 “메라 남 새 빛 헤” 라고 침착하게 대답한 후 뿌듯해하는 동안 아이는 자신의 이름이 미히카 라고 밝히고 나의 손을 잡고 미끄럼틀로 이끌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유일하게 다가와 준 덕분에 외로웠던 타지 생활의 재미를 느끼게 해 준 소중한 아이였다. 이후로 그 아이와 종종 놀이터에서 놀았고, 아빠의 일로 인해 인도의 다른 지역으로 떠날 때는 서툰 영어로 작별을 고했다.


내 손을 꼭 잡아 주며 “씨유 어게인” 이라 말한 그 아이를 안타깝게도 다시 만날 수 없었지만, 난 미히카의 까만 눈동자와 곱슬거리는 짧은 머리카락을 추억한다. 우리 가족이 새로 거처를 옮긴 지역은 한 시간 거리에 네팔 국경이 있는 인도 북쪽의 실리구리라는 시골도시였다. 인도에서 한국인에게 비자 연장은 쉽지 않은 일이라서 우리 가족 또한 쉬지 않고 비자 여행을 다녀야했다. 비자의 기간에 따라 여행이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 3개월 비자를 받은 우리는 연장을 위해 네팔로 여행을 떠났다. 비행기면 인도 대사관이 있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까지 가는데 딱 1시간이 걸린다. 가족 5명의 항공료가 우리가족에게는 버거워서 이틀이나 걸리는 버스를 탔다. 버스 여행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정도로 고달픈 시간의 연속이었다. 버스 바닥이 숭숭 뚫린 건 물론이요, 2박 3일 동안 몸을 기대야 했던 의자는 딱딱하고 젖혀지지 않았다. 코를 찌르는 악취는 애교였다.


다섯 시간에 한번 정도 나오는 휴게실엔 화장실이 딱 두 칸 있었다. 6년도 더 된 일이지만 내가 큰일을 보느라 자신의 볼일을 화장실 앞에서 그냥 본 언니에게는 아직도 미안한 맘이다. 이런 환경에서 이틀을 보내야 하는 것도 엄청난 고역이었건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홍수로 범람한 물이 우리가 지나야 하는 다리를 삼킨 바람에 더 먼 길로 하루 더 달려야 했다. 우리는 히말라야 산맥을 타고 카트만두로 가고 있었고 달리는 버스에 부딪히는 차가운 바람은 손잡이가 떨어져나간 유리 구멍으로 숭숭 들어왔다. 가로등도 없어 정말 암흑 같은 밤에 그 구멍 두 개에 손가락을 끼우고 잠을 청하는데 설상가상으로 네팔인들이 버스를 지나가지 못하게 도로를 막았다. 엄마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장례식이 있으면 종종 길을 막는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기왕 멈춘 김에 몸이라도 풀 겸 버스 밖으로 나가 체조를 했다. 달을 보며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내딛는데 갑자기 밑이 허전했다. 바로 앞이 절벽이었던 것이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1미터가량 떨어졌을 때 억세고 긴 풀들에 다리가 엉켜 걸렸고 아빠와 버스에 타고 있던 중들과 아주머니들이 합세해 끌어당겨 주셨다. 그때 나는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날이 밝으면서 태양에 비친 아찔한 절벽을 보는 순간 나를 끌어올려주신 승객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인도에서의 경험 중 단연 기억에 남는 것은 6.0강도의 지진이었다. 한가로이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던 어느 날, 갑작스런 흔들림을 느끼고는 동생에게 의자를 흔들지 말라고 신경질을 냈다. 동생은 억울한 표정을 하고 자기가 흔든 게 아니라고 했다. 흔들림은 더 커졌고, 상황을 파악한 나는 “지진이야!! 아빠, 오빠 빨리 나와!!” 하며 맨발로 집을 뛰쳐나갔다. 아파트 복도와 계단에는 필사적으로 나가려는 사람으로 난리 통이었고 나는 깨진 타일조각을 밟아 베인 발로 사람들 사이에 끼여 발버둥 쳤다. 당황하는 내 손을 오빠가 잡아끌고 건물 밖으로 끌고 나왔다. 겨우 빠져 나온 나는 아파트 공터에서 아빠와 동생을 찾았다. 지진은 멈췄지만 건물에는 금이 쩍쩍 나 시멘트 가루가 떨어지고 있었고, 유리창은 성한 게 없었다.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해 벌벌 떠는 나를 아빠가 감싸 안아 주셨고, 오빠는 괜찮다며 다독여 주었다. 본인도 많이 놀랐을 텐데 그렇게 든든하게 있어주는 게 참 고마웠다.


한국에 있던 엄마에게 전화하자 차분한 말투로 마음을 진정시켜 주셨다. 여진의 위험성 때문에 한동안 건물로 들어가지 못했고, 나중에 다들 집으로 들어가 잔해를 치우는데도 난 선뜻 건물로 들어가지 못했다. 망설이는 나에게 아빠가 괜찮다며 만일 또다시 지진이 일어나더라도 꼭 지켜주겠다고 말씀해 주셔서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이 지나 이제 십대의 끝자락에 서있는 지금, 나의 삶에 중요한 기억들을 차지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나를 위해 울어주고 행복을 빌어주던 한국 초등학교 단짝 다정이, 말이 통하는 친구 하나 없어 외로워하던 나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준 미히카, 절벽에서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나를 끌어올려준 많은 승객들, 그리고 언제나 곁에 있어 든든한 우리 가족. 다사다난했던 크고 작은 일들 곳곳에 사람이 있었고 그들은 언제나 도움을 주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내 삶은 더욱 빛나고 행복했다. 좋은 사람만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히 만날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데 기여할 거라고 믿는다. 내 인생에서 쓸모없는 사람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특별한 사람들이 만들어준 특별한 십대를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앞으로 내가 만날 사람들이 기대된다. 사람은 추억을 만든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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