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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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연해주 동쪽, 일본 홋카이도 북쪽에 있는 사할린은 겨울이 길고 혹독한 추위로 인해 유배지로 여겨질 만큼 사람이 거의 살기 어려운 섬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북위 50도를 경계로 남부지역을 차지한 이후 탄광채굴 등 자원개발과 함께 한인 등 이주민을 들여왔다. 1932년 한인 거주자가 5천200여 명까지 늘어났으나 소련의 스탈린 정권은 1937년 10월 18일 극동지역 한인과 함께 1천155명의 사할린 한인들을 배에 태워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낸 후 다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후 사할린에는 일본령인 남사할린에만 한인이 거주하게 됐으나 또 다른 시련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1938년 4월 발효한 국가총동원 체제를 강화, 강제징용 형태로 한인들을 남사할린으로 동원했다. 강제동원 이전에 자의로 사할린에 건너갔던 한인들도 현지에서 징용당했다. 1939년부터 4년간 남사할린에 투입된 한인 노무자는 1만6천여 명으로 36개소의 탄광을 비롯해 벌목, 제지공장 등에 배치됐다.


 전쟁 막바지인 1944년 패전의 기운이 짙어지면서 수송선 부족과 연합군 공격으로 사할린에서 생산한 석탄을 본토로 가져가기조차 어렵게 되자 일제는 사할린 한인들을 또다시 일본 본토로 강제동원했다. 한 번도 기가 막힌 징용을 두 번이나 겪는 ‘이중징용’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노동조건이 사할린보다 위험하고 열악한 본토 26개 탄광으로 보내졌고 이 중에는 지옥 섬으로 악명높은 하시마(일명 군함도) 탄광도 포함됐다. 조사에 따르면 이중징용을 당한 한인은 3천191명이며 1천여 명은 사할린에 가족이 있는 가장이었다. 이중징용은 가족 이산, 가정 해체의 아픔까지 안겨줬다.


사할린 한인들은 1945년 해방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절망감과 공포에 떨어야 했다. 패전에 따른 불안감과 공황에 시달리던 일본인들이 한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수십 명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사실이 피해자 가족과 이웃 등의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일본의 패전 이후 1946년의 ‘소련 지역에서의 철수에 관한 미·소협정’ 등을 통해 약 30만 명의 일본인이 거의 전원 사할린으로부터 철수했지만, 당시까지 일본인으로 규정됐던 사할린 한인들은 철수 대상에서 제외됐다. 일제 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강제징용된 한인 숫자는 4만3천여 명에 달한다. 해방 후 살아남은 남한 출신 한인 2만3천여 명은 차별대우의 설움을 받으면서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채 고국에 돌아가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사할린 잔류 한인의 귀환을 호소하는 동포들의 목소리가 한국과 일본, 사할린에서 이어졌다. 1958년 일본인 부인과 함께 사할린에서 철수한 박노학(1912~1988)씨 등은 도쿄에서 ‘사할린억류 귀환자 동맹’을 결성해 귀환 희망자 명단을 작성하고 사할린 동포와 한국 가족 간의 서신 교환을 위한 교량 역할을 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정권이 도입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개방) 정책과 ‘88서울올림픽’ 개최, 1990년 한·소 수교 등이 이어지면서 사할린 한인 귀환은 급물살을 탔다. 1989년 한·일 양국 적십자사 주도로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사업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4천346명이 고국의 품에 안겼다.


외교부 집계에 따르면 사할린 거주 한인은 2014년 말 기준 2만5천246명이다. 사할린 전체 인구가 60만 명이 채 안 되는 규모임을 고려하면 한인의 비중은 적지 않다. 주도 유즈노사할린스크에 19만 명이 거주하고 한인도 이곳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영주귀국자를 제외하고 사할린에 남아있는 한인 1세대는 600여 명. 80대 이상 고령이라 한해가 다르게 1세대 숫자는 줄어들고 있다. 사할린 한인은 3~4세로 이어지고 있다. 3세부터는 한국말을 거의 몰라 이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과 한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이 시급한 과제이다. 부모의 교육열 덕분에 사할린 사회에서 성공한 한인들이 많다. 강영복 사할린 경제법률정보대학 총장, 유즈노사할린스크 정무부시장을 지낸 김홍지 노인회장 등이 꼽힌다.


재정난의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말방송의 김춘자 사장과 새고려신문의 한인 3세 배윅토리아(한국명 배순신) 사장이 우리 말과 글, 문화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한인의 식습관은 사할린의 음식문화도 바꿔놓았다. 김치 담가 먹는 것은 물론이고 고사리 미역 무침과 데친 문어와 오징어 등은 러시아인도 즐겨 먹는 음식이 됐다. 최근에는 케이팝 영향으로 한인 3, 4세는 물론 러시아인 젊은층 사이에서도 한국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할린 한인사회가 당면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역사기념관’ 건립이다. 2006년 유즈노사할린스크에 한인문화센터가 세워져 한인 동포단체 여러 곳이 들어섰지만, 강제동원 등 한인 이주역사와 한인 정체성을 알릴 공간이 없는 실정이다.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사업을 추진하면서 대상자를 해방 당시 사할린 거주 또는 출생자로 제한하고 2인 1가구 조건을 붙인 것도 재고해야 한다는 비판이 많다. 조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는 한인 2세도 많고 무엇보다 가족과 헤어져서 사는 이산의 아픔은 더는 줘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사할린으로 끌려가 하루 열두 시간씩 일하면서 노임은 강제로 ‘우편저금’에 넣었는데 일본은 이 돈을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다”는 사할린 징용 한인 피해자들의 한 맺힌 호소도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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