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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동료들은 나를 ‘박 선생’이라 부르는 대신 ‘맹모’ 즉 맹자 어머니 같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지나친 평판이어서 쑥스럽지만 싫지는 않다. 동양의 성현 맹자는 어렸을 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 세 번이나 이사해 ‘맹모삼천지교’라는 이야기를 후세에 남겼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자녀 뒷바라지를 위해 학교 부근에 셋집을 구하거나 아예 집을 사 이사하는 부모들이 적잖다. 동료들이 나를 ‘맹모’라 부르는 것도 사실은 우리 집이 아들이 다니는 학교와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지만 대학입시를 앞두고 학교 부근으로 새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고3이 되면서 저녁 자율학습이 길어져 밤늦어서야 집에 온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아들의 안전도 걱정이고 공부로 오는 정신적 압력을 얼마라도 덜어주기 위해 나는 이사를 택했다. 그리 멀지도 않은데 괜히 이사해 불편한 셋방살이를 하느냐며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들의 공부환경을 염두에 둔 이사였기에 셋집 찾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소개를 받아서 가보면 낡은 주택이라 난방이 문제거나 빛이 잘 들지 않기도 하고 다 좋은데 피아노학원이 옆에 있어 소음이 걱정되는 등 결점이 보였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듯이 나는 운동화를 신고 며칠을 발바닥이 닳도록 찾아다녔다. 시력이 좋지 않은 나로서는 10층 이상의 건물에 붙은 셋집 광고를 잘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이 전에 베이징 관광을 하면서 산 러시아제 망원경을 목에 걸고 다녔다. 망원경으로 보면 광고판 글이 훨씬 잘 보여서 난 신이 나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런데 주택단지 경비원 할아버지가 나를 불러 세웠다. 누구네 집 동정을 살피는 도적으로 의심했는지 신분증을 제시하고 방명록에 기록하라고 했다. 고3에 다니는 아들을 위해 맞춤한 셋집을 찾고 있다고 설명하자 할아버지는 “망원경까지 들고 셋집을 찾는 사람은 처음 본다”며 허허 웃으셨다. 그리고는 세를 내놓았다는 몇몇 집주인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어렵게 셋집을 구했지만 고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콧구멍만 한 주방이라 조심해도 싱크대 모서리에 부딪히는 경우가 많아 이마가 늘 퍼렇게 멍들곤 했다. 또 집이 하도 작아 밥을 지을 때면 열기가 퍼져 집안이 단가마로 변하면서 숨쉬기조차 가빴다. 그런데도 세 번이나 이사했다는 맹자의 어머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즐겁기만 했다. 또 자랑스러운 아들이 있기에 이런 일도 있게 된다고 하며 자부했다. 이곳은 학교 부근이라 나처럼 자녀 뒷바라지를 위해 이사 온 집들이 많았고 밤늦도록 불빛이 꺼질 줄 몰랐다. 아들의 등하교가 쉬워졌고 동네 분위기도 좋은지라 이사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세 번 옮겼다는 맹자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공부로 성공한 자녀를 둔 부모를 만나면 나는 밥을 사면서라도 경험담을 듣곤 했다. 어려서부터 명인전을 많이 읽게 해서 호연지기를 키워준다든가 자녀교육에서 엄마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크다는 등의 경험을 배워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아들이 고1 2학기를 맞아 문과와 이과를 선택해야 할 때가 있었다. 남자이고 물리 성적도 좋으니 당연히 이과를 선택할 줄 알았는데 아들은 법률에 관심이 많다며 문과를 선택하려 했다. 서로 자기 고집을 굽히려 하지 않았기에 나와 아들은 곧바로 대치상태에 들어섰다. 그래서 나는 자식 뒷바라지에 성공한 석 선생과 정 선생에게서 조언을 구했다. 부모라면 자식을 믿고 본인의 의견을 존중하라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대답이었다. 나는 이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친구 중에는 자식의 주장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이과반에 보냈더니 2학년이 다 지나도록 성적이 잘 안 나왔고 결국 3학년에 올라서 다시 문과로 전향했다. 뒤늦은 공부이다 보니 결국 원하던 대학에 붙지 못했다. 자식이 무척 자기를 원망한다는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동료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아들의 선택을 존중해 준 것이 옳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것이 ‘맹모’가 되는 또 하나의 지름길임을 깊이 깨달았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엄마가 되려면 모든 배움의 기회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번 여름방학에 한국의 유명 교사들이 가르치는 ‘영재 만들기’ 강좌가 있다기에 며칠 전부터 손꼽아 기다렸다. 이런 좋은 배움의 기회를 혼자만 누릴 수 없다 싶어 나는 주최 측의 허락을 받고 친구들과 함께 가려고 했다. 그런데 친구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한 친구는 “강의는 들을 때뿐이고 행동에 옮기지 못하니 아무 효과가 없더라”며 거절했고 또 다른 친구는 “이젠 공부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아프다. 넌 아직도 공부하니?”라며 나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그중에는 “애가 다 컸는데 이제 무슨 교육이냐”며 도리질 쳤다. 결국, 나는 혼자서 강의를 들으러 갔다. 매번 이런 강의를 듣고 집에 돌아오면 실천해보았는데 실제로도 아이에게 도움이 됐었다.

나는 친한 친구가 세 명인데 자식들 나이도 비슷한지라 방학 때면 자녀들과 함께 여행을 다녔다. 지난번에도 흑룡강성의 유명 관광지인 경박호로 유람을 가면서 아이들과 대학입시 추세며 인기학과와 취업 전망 등에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은 내가 자기 엄마와 달리 이야기가 잘 통한다며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끊임없이 배워온 덕이었다. ‘업힌 아이한테서도 배우라’는 공자의 말처럼 배움에 게으르지 않은 엄마이기에 인정받을 수 있고 아들의 바른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으로 자부심을 느낀다. 나는 평범한 여성, 평범한 엄마이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부터 아이를 해외 유학 보낼 수 있는 부자 엄마도 아니고 내 권력으로 제일 좋은 학교의 제일 좋은 반에 넣을 수 있는 ‘국장 엄마’도 아니다.

20여 년간 교사로 근무하면서 나는 우리 민족이 개혁 개방의 여파로 인해 한국과 중국 내륙도시로 돈 벌러 나가면서 가족 이산의 아픔을 수없이 보아왔다. 그러면서 아무리 넓은 세상과 큰돈이 나를 유혹해도 내 손으로 자식을 키우겠다는 신조를 지켜왔다. 그래서 일본으로 시집간 동생이 여러 차례 건너오라고 제의했지만 포기했다. 맹자 어머니는 2천여 년 전에 벌써 교육환경의 중요함을 깨달은 현명한 엄마였고 지혜와 사랑으로 자식을 일대 성현으로 키우셨다. 영웅 나폴레옹의 배후에도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뛰어난 어머니 레티치아가 있었으며 조선의 위대한 학자 율곡 선생의 뒤에도 지덕을 겸비한 신사임당의 사랑과 교육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 교육의 위대함이다 ‘맹모’가 되는 길은 한 갈래가 아니다. ‘맹모’는 한사람만이 아니다. 지혜로운 사랑을 주는 현명한 엄마는 누구나 ‘맹모’가 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창 너머로 늦은 시간까지 불을 밝히는 아들 학교의 교실을 바라본다. 또 하나의 ‘맹자’가 태어나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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