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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문학


1990년대 중반의 나의 모교는 50년 가까이 이어져 오는 세월에도 불구하고 가지런하고 반질반질한 느낌을 주었다. 교정의 키 작은 꽃나무들은 가지런히 배열된 솜사탕처럼 눈부신 봄 햇살에 화사함을 더해주었고, 사박사박 밟을 수 있도록 길게 깔아놓은 은행잎들은 소녀감성 가득하신 교장선생님의 바램에 맞춰 가을을 맞은 여고생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의 계절은 고1 끝자락 즘에 부모님의 이혼으로 말미암아 스산한 초겨울에서 머물러 있었다. 해가 두 번 바뀌어 그 친구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화목한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라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천편일률적인 자기소개서와는 정반대로 나는 이혼 전까지 끊이지 않던 부모님의 싸움 소리를 울면서 숨죽여 들어야 했다. 부모님을 대신해 시장바닥에서 억척스런 아줌마들과 비닐봉지를 들고서 실랑이를 해야 했으며, 거무스름하고 둔해 보이는 자전거에 감자 한두 상자를 싣고 배달을 다닐 만큼 집안형편이 좋지 못했다.

어릴 적 학원구경은 어려웠어도 공부는 그럭저럭하면서 초등학교만 간신히 나오신 부모님의 바람처럼 나중에 커서 대학은 꼭 가야지 하는 세상물정 모르는 생각만 하면서 컸다. 날이 갈수록 부모님의 언성은 더 잦아지고 급기야 가까이 살고 있던 친척들까지 들락날락하면서 결혼생활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쯤, 딸 둘의 장녀였던 나는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부부간의 이야기들과 아직도 잊히지 않는 싸움의 몸짓들을 보면서 부모님의 이혼에 동의하고 말았다. 아니 동의하는 편이 더 낫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혼 후 엄마는 낮에는 시장 노점에서 채소를 팔고, 저녁에는 치킨 집에서 닭을 튀기며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형편에 고전해야만 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내가 죽도록 싫은 전남편과 너무 닮아서였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와 나는 싸웠다. 지금은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 그 싸움에 아니 엄마의 한풀이에 나도 점점 지쳐갔다. 새벽까지 악을 쓰는 엄마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고, 울다가 잠들어 깨어보면 이미 등교시간은 지나 있었다. 아파죽어도 교실에 와서 죽으라고 할 정도로 엄했던 학교를 나는 지각도 결석도 밥 먹듯 했다. 늦게라도 등교할라치면 어김없이 마주치던 교장선생님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했고, 퉁퉁 부은 나의 눈을 보시던 담임선생님은 애써 모른 척 해주셨다.

교실 안에서 나는 한결같았다. 수업이 시작되면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을 청하고, 종례시간이 돼서야 몸을 일으키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나마 담임선생님의 독일어 수업시간에는 눈이라도 뜨고 앉아서 애써 모른 척해주시던 그 마음에 대한 성의라도 보이려 했다. 그저 학교에라도 가는 것이, 싫어도 집구석에 들어가는 것이, 도장에 나가 몸이라도 구르는 것이, 하고 싶은 것이 없던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고3이 되어 취업반이었던 나는 매주 월요일에만 본교에 갔다. 쉬는 시간 학교 밖 불그레한 봄꽃들과는 상반되는 피곤한 얼굴로 밀린 숙제를 하느라 정신없는 친구들의 얼굴을 교실 밖에서 슬쩍 보고 되돌아오기를 몇 번하던 나는 그 아이의 소식을 들었다.

짧은 커트머리에 안경을 썼던가 벗었던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튀지 않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상위권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한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그 아이가 혈액암이라며 살 날이 3~4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의사도 부모님도 말리는데 친구들 보고 싶고 끝까지 공부하고 싶다며 학교에 오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힘든지 한걸음 뗄 때마다 큰 숨을 몰아가며 쉬어야 하는데도 퉁퉁 부은 다리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걸어서 말이다. 그 날 2교시가 끝나고 화장실을 가고 싶은 마음에 급하게 교실 문을 나왔다가 멈춰 섰다. 그 아이가 힘겹게 계단을 오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일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학교 종소리도 내 심장도 멎는 듯 했다. 복도에서 울리는 다른 친구들의 발자국 소리는 무음처리가 되고 그 아이와 나만이 그 공간에 있는 듯 다른 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 아이는 한 손으로 계단 난간을 부여잡고 고개를 들고서 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내려 보았다. 나는 발가벗긴 사람처럼 부끄럽고 뭐라고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입만 우물쭈물 거렸다.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저 친구보다 내가 못한 게 뭐가 있다고 죽을병에 걸렸을까 하고 신을 원망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이런 나라도 같은 반 친구였다고 기억해 두었다 하늘로 가려고 두눈 속에 그리도 애틋하게 담았던 걸까….

가늠하기 힘든 시간이 흐르고 나는 뭐라도 해야 했기에 “안녕”이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인사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 아이는 날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 순간 꽁꽁 얼어있는 몸을 뜨거운 목욕탕 물속에 담그듯 따끔따끔 온 몸에 온기가 흐르고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찌릿하면서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내게도 2년 만에 봄이 찾아왔음을 느꼈다. 그 아이의 보일 듯 말듯 한 미소가 나에게 가져다 준 계절이었다. 얼마나 대단한지…. 어린 나이에 끝까지 본인의 인생을 충실히 살다 가려고 애쓰는 그 모습에서 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내가 얼마나 한심한지 깨닫고야 말았다.

그까짓 부모님의 이혼이 뭐라고, 돈이 없어 학비 좀 늦게 내면 어떻고, 당장 나 봐주는 이 없는 게 뭐가 어때서 이렇게 살고 있었는지…. 이렇게 건강한데, 저 아이의 처지에 비하면 난 백배 천 배 나은데, 뭐라도 할 수 있는데, 아직 늦지 않았는데 라고 머릿속으로 되뇌면서 진짜 나만의 봄을 맞이했다. 수년간 한글학교에서 저학년 아이들과 공부해 오다 올해는 9학년 학생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한국의 청소년과는 또 다른 사춘기를 겪어 내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좋을 지 고민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나의 십대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정확히 이십 년이 지난 지금 잊고 살았던,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그 아이가 오랜만에 내 가슴에 두 눈에 봄비를 뿌렸다. 수업시간에 그 아이와의 일을 얘기해 주면서 몇 번이고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숨을 고르면서 참아냈다. 그러면서 나의 학생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비상의 순간과 함께 짜릿한 전율을 맛볼 수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스무 해도 못살고 가버린 그 아이의 짧은 인생이 나를 살 수 있게, 지금의 나로 살 수 있게 만들어 준 기적이었음을 혹여 불효자식으로 가슴에 묻고 계실 그 아이의 부모님께 이렇게나마 글로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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