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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문학

 

동포의창

시간의 앨범을 들여다보며 정 씨는 속울음을 토해냈다. 기억 켜켜이 묻어 있는 삶의 궤적을 따라 세월을 거슬러갔다. 오랜 기억의 빗장은 허물없이 열렸고, 때론 추억으로 때론 상처로 어루만지고 내리쳤다. “아버지가 49살이 되던 해 17살인 처녀를 아내로 맞이했지요. 한마디로 논 열 마지기에 팔려왔어요. 그 처녀가 바로 저희 어머니구요.” 정광수(65) 씨의 어머니는 가난한 집안의 딸로 부잣집에 시집가면 친정집 형편이 좀 나아지지 않겠나 싶어서 결혼을 결심했단다. 당시만 해도 만석꾼이었던 아버지는 애 셋을 낳은 첫 부인과 사별하고 첩과의 사이에서 4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67살일 때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고 7년 후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정 씨가 태어난 1950년은 전쟁 통이었고, 동란 후에는 토지개혁으로 아버지의 많은 재산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동복·이복을 합쳐 12남매와 어머니 사이에서 정 씨는 암울한 어린 시절을 보 냈다. 3살 때 천연두를 앓았다. 얼굴에 더덕더덕 뚫린 흉터 구멍들을 볼 때마다 절망감에 몸서리쳤다. 더구나 어머니는 그를 낳을 때 여러 번 낙태 시도를 했다. “내가 그렇게 죽기를 바랐다는데…. 아버지가 독한 년이라고 했대요. 그때부터 난 살려는 의지가 강했나봐요. 천연두에 걸려 죽은 애들이 많았는데 그때도 살아남았으니까.” 젊은 어머니는 항상 도망갈 꿈을 꿨고 어린 광수는 자살을 꿈꿨다. 사춘기 무렵인 어느 날 그는 삼천포 앞바다가 보이는 곳 벼랑 끝 바위 위에 올라섰다. 그때 퍼뜩 뇌리를 스치는 것은 바다 저 끝 어딘가에 가고 싶다는 거였다. 아주 멀리 떠나고 싶었다.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 가져온 신문에서 정 씨의 눈에 섬광처럼 다가온 문구. 파독 간호사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눈이 번쩍 뜨였죠. 집을 떠날 유일한 기회일 것 같았어요. 이 지독한 운명의 고리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어머니를 졸라 간호보조원 학원에 등록하고, 1년 동안 간호 일을 배웠다. 이후 파독 간호사에 지원했고, 결국 꿈을 이뤘다. 오빠들은 노발대발이었다.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정 씨는 가장 아픈 새끼손가락이었다. 그런 막내가 막상 이국만리로 떠난다니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 하지만 정 씨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당시 스무 살이던 그는 결국 3년만 있다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1970년 독일에 도착한 정 씨는 온통 회색빛인 우울한 독일의 하늘을 보고 또 울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선택한 운명에 주저하지 않았다. 병동에 근무하면서 시간을 쪼개 간호학교를 다녔고 1975년에 졸업했다. 그해부터 산부인과 수술실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독일에서 맨 처음 인공수정을 시도한 병원이기도 하다. 80년대 들어서는 에이즈센터를 구축하면서 내시경 관리 담당 간호사로 일했다. 이후엔 심장내과로 옮겨 2014년까지 28년간 심장연구소 수간호사로 일한 후 정년퇴직했다. 그녀는 독일의 심장연구 발전을 눈으로 지켜본 장본인이다.





그녀의 열정에는 남편의 사랑과 관심이 있었다.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독일 지하철 안이었다. 비록 얼굴색이 검었지만 첫인상이 똑똑하고 야무져 보였다. 남편 피터는 우간다 출신으로 베를린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지멘스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다.


결혼한다고 한국에 소식을 알렸을 때 오빠들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유는 피부색이었다. 1980년에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비석에 자식들 이름을 새겨 넣었는데 딸 정광수 옆에 사위 피터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나중에 오빠가 독일에 와 정 씨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야 안심을 했다고 한다.


정 씨는 1982년에 아들 스티브를 낳았고 한글학교를 보내며 정체성 교육을 시켰다. “한국인들로부터 아들이 차별을 받기도 했죠. 백인도 아닌 흑인과의 혼혈인이니까요. 한글학교에서 ‘왕따’ 당하지 않도록 한국 아이들을 데려다 집에서 재우고 놀게 했어요. 그런 속에서도 아이가 참 잘 컸어요.” 남편 피터는 자신의 모국인 우간다를 그리워했다. 당시 우간다는 군사독재로 방문이 어려웠다. 1986년에야 정 씨는 남편과 함께 우간다를 방문했다. 아프리카의 진주라고 불린 우간다는 그때 에이즈 천국이 되어 있었다. “정년퇴직을 하자 남편이 자신의 조국을 돕고 싶다고 했어요. 그래서 만든 단체가 사단법인 ‘힐페 퓌어 아프리카-게겐 에이즈 운트 말라리아’(Hilfe fu..r Afrika-gegen Aids und Malaria e.V., 아프리카를 위한 도움-에이즈와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입니다.”


2003년에 단체를 설립했고, 우간다에 있던 남편의 땅에 집을 지었다. 위층에는 병원을 세우고 아래층은 직업학교를 만들었다. 정 씨 또한 자신이 근무한 병원에서 병원 물자 등을 지원받아 보내곤 했다.





단체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가던 2014년이었다. 당시 남편과 함께 우간다를 방문한 그녀는 먼저 독일로 왔는데 이틀 후 느닷없이 우간다에서 남편이 죽었다고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우간다로 달려간 그는 남편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는 살아갈 힘을 잃었다.


하지만 그때 아들 스티브가 힘없이 쓰러진 정 씨의 손을 일으켰다. 자신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지난해에는 우간다에 아버지의 생각을 담은 한국, 독일, 우간다 세 국가를 상징하는 작은 비석도 세웠다. 정 씨는 현재 아들과 함께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아프리카에 희망의 빛을 전하고 있다. “말라리아는 조기 치료가 제일 중요합니다. 3유로면 말라리아 검사를 할 수가 있고 한 달에 35유로면 꺼져가는 한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어요.” 정 씨는 하나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나무가 돼 열매를 맺은 것처럼 남편 피터의 생명이 아프리카에 희망이 되었을 거라고 말한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꽃을 피운다. 그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의 기운은 힘을 얻는다. 정 씨는 오늘도 소외받은 아프리카 땅에 희망의 꽃씨를 퍼뜨린다. 그녀가 어린 시절 절망의 순간에 먼 땅을 바라봤던 것처럼 지금 우간다는 그녀가 사는 독일 땅을 바라보며 희망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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