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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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문학


내 아들은 내가 배 아파 난 아들이 아니다. 그러나 아들은 태어나면서 내 아들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아들은 조카다. 그 애는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엄마가 없었고 아빠는 몸이 좋지 않았다.


시동생은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미국에 있는 나에게 말했다. “형수, 형수가 우리 아들 맡아서 키워주면 안되나?”라고. 나는 두 번도 망설이지 않고 알았다고 말했다.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들은 5살까지 아빠하고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시동생이 “형수 이제 데려가세요”라고 말했다. 시동생 몸이 더 안 좋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들은 울지도 않고 낯선 이곳으로 왔다. 새로 생긴 누나도 엄마도 아빠도 다 낯선 이곳인데 5살 꼬맹이는 울지도 않았다.


자기 운명인 것처럼 너무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점심을 싸주면 가지고는 가는데 먹지는 않고 도로 가져와서는 슬쩍 침대 밑에 두는 바람에 청소를 할 때면 몇 개가 나오고는 했다. 아들은 말은 안 해도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원형탈모 증세까지 보였다. 겉으로는 잘하고 있는 것 같아도 힘이 들었나 보다.


처음에는 나도 힘이 들었다. 어떤 날은 괜히 맡아서 키운다고 했나 하는 생각도 했다. 다른 형제도 있는데 내가 무엇 한다고 그랬나 하는 생각도 가끔씩은 들었다. 내가 아들을 맡아서 키운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반대를 했다. 자기 자식도 힘든데 남의 자식을 맡아서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또 어떤 이는 내가 딸만 둘이라 아들이 없어서 키운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떤 사람은 정말 모르는 남의 자식도 키우는데 나는 조카를 못 키우나’ 하고…. 그 애가 딸이었어도 나는 키웠을 것 같다. 내가 그런 상황이면 내 가족 누군가는 해줄 것이란 생각을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아들은 예쁘고 밝게 잘 자라주었다. 나도 누나들하고 다르게 생각하지 않고 야단치고 칭찬하고 하면서 아들을 키웠다. 처음에는 나도 그 애도 서먹했다.


나도 똥기저귀 갈면서 잠 못 자면서 키운 아들이 아니라 한다고 해도 어색함이 있었다. 그러나 정이란 사랑이란 인위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정말 우리 애들하고 하나도 다를 것이 없이 키우고 있었다. 내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정이 그렇게 들었다.


아들 8살 때 시동생이 죽었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동생은 아들을 보내고 전화 통화를 해도 바꾸어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물어보기만 했다. 내가 바꾸어 준다고 하면 괜찮다고 잘 크고 말 잘 듣나 하고, 형수 믿는다고 죽어서도 은혜 갚는다고 매번 이야기를 했다.


어느 해는 남편이 한국에 가니 아들 선물이라고 신문지에 싼 것을 줘서 보니 차 안에서 쓰는 작은 청소기였다. 받아는 왔는데 아들에게 필요도 하지 않는 것이지만 줄 것은 없고 그것이라도 주고 싶었는가 보다 하고 남편이 얘기하며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그런 시동생이 이 아들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또 어떻게 이 애한테 말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들었다.


아들에게 한국 아빠는 하느님이 불러서 하늘에 먼저 가서 아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하니 8살 꼬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누나와 노는 것을 보고 그래도 내가 잘못 키우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


아빠를 잊지 말라고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란 큰 의미보다는 아들에게 잊지 말라고 그날은 시동생 얘기를 주로 하면서 아들에게 아빠 추억을 준다. 얼마 살지 않고 간 사람을 누군가가 기억을 해주고 있다는 것, 아들에게는 우리 말고 너를 너무 사랑한 사람이 또 있었다는 것을.


아들한테는 그날은 한국 이야기를 많이 시킨다. 5살 꼬마가 기억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살던 집 이야기, 혹시 생각나는 친구가 있나 하고 매년 어쩜 똑같은 이야기지만 그래도 아들에게 말을 시키고는 한다.


나는 속으로 항상 기도한다. 삼촌, 이 아이가 나쁜 길로 가지 않고 방황하지 말고 밝고 예쁘게 잘 자라서 좋은 짝 만나서 오래오래 잘살게 해줘요. 삼촌 몫까지 잘살게 해 줘요. 밖에서 어떤 친구를 사귀게 될지 모르니 삼촌이 나쁜 길로 가지 않게 해 달라고 항상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그 덕인지 우리 아들은 너무 예쁘게 자라 주었다. 남자애들이 다 겪는다는 사춘기 방황도 없이 너무 좋은 친구를 사귀고 내가 걱정하는 짓을 한 번도 안했다. 운전도 시켜보면 우리 딸들보다 더 천천히 안전하게 해서 내가 너무 고마웠다.


남자애들은 과속을 많이 해서 벌금 딱지도 잘 떼인다는데 우리 아들은 별명이 영감님 운전이다. 너무 안전하게 해서 누나들이 붙여줬다.


고등학교 때에는 에너지가 넘쳐서 다른 곳에 혈기가 넘칠까 걱정했는데 축구 선수를 하고 거기다가 공부도 잘해 중고등학교를 우수 학교를 다녔고 내가 사는 곳에서 제일 좋은 주립대학을 전 학년 장학생으로 들어가더니 어제는 졸업을 했다.


아들이 졸업식장에 들어오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눈물이 주책없이 상황 판단도 못하고 나오는지 옆에 있는 사람이 볼까 부끄러웠다.


당당히 졸업식장에 앉아 있는 내 아들.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 태평양을 건너 낯선 곳에 온 5살 그 꼬마가 지금 당당하게 저 자리에 앉아서 이곳에서 나고 자란 애들보다 더 씩씩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니.


나는 아들 졸업식을 지켜보면서 17년 세월이 영화관에 영화 필름이 돌 듯 지나갔다. 아들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기까지 오기가 또 얼마나 벅차고 힘들었을까, 내가 정말 친엄마만큼 해 주었을까, 아들에게 나는 무엇일까, 그곳에 앉아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이제 아들은 대학원에 간다. 대학이 끝이 아니라 1장 1막이 끝나고 이제 2막이 시작된다. 지난해에 이어 6월에는 못사는 남미 쪽에 가서 봉사하러 간다. 아마 시간이 되면 매년 가서 봉사를 할 것이다. 자기 사비를 들여가는 봉사라 더 의미가 있다. 물이고 모든 물자가 부족하니 아껴서 쓰는 법,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것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오는 것 같아 고맙다.


작년에 갔다 와서는 정말 많은 것을 느끼고 왔다고, 자기를 키워줘서 고맙다고 말해 감동을 주었다. 나에게 이런 기쁨을 준 우리 아들이 너무 고마웠다.


아들은 9월이면 치대 대학원에 간다. 그리고 말한다. 치대를 나오면 이가 아파도 돈 때문에 못 가는 사람에게 꼭 힘이 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라고.


17년을 돌아보면서 생각하니 아들이 와서 나에게 너무 많은 기쁨을 주고 사랑을 주었다. 그래서 감사한다. 보이지 않는 그분에게 그리고 멀리 있는 시동생에게도. 그리고 크게 외친다.


“아들, 엄마가 많이 사랑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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