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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문학


우리 집에는 내가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다루는 우리 천씨 가문의 족보 책 두 권이 있다.


한지를 명주실로 깔끔하게 매어놓은 책은 오랜 세월 속에 인젠 누르스름하게 색 바래고 보풀이 일기 시작하였건만 나는 꼭 마치 보배 단지 다루듯이 소중히 한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와 두 딸은 그까짓 낡아 빠진 책에 별 신경을 쓴다며 이해가 안 간다고 한다.


그러건 말건 휴일에 집에서 여가가 있을 때면 가끔씩 족보를 꺼내서 펼쳐 보곤 하는데 고문(古文)으로 쓰인 옛 글들을 한 글자 한 구절씩 번역하고 주해(註解)를 달기도 한다. 한문 지식을 배우는 재미보다는 선인들이 후배에게 남겨놓은 역사를 한 구절씩 해석하다보면 저도 몰래 흘러간 세월의 감동에 푹 빠져들게 된다.


족보란 한 족속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밝혀놓은 책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책에 적힌 글줄들을 읽노라면 지난 세월 우리 백의민족 역사의 모퉁이마다에 선인들이 남겨놓은 발자취가 역력히 보인다.


어린 시절 반들반들한 노란 종이에 남모를 글자들이 가득 찍힌 족보를 보고 쓸모없는 책인 줄 알고 딱지를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책을 소중히 만지면서 이리 말했다.


“얘야, 우리는 원래 조선에 살았는데 일본 놈들의 압박과 계속된 가뭄에 너무도 살기 어려워 1920년대 초에 너의 조부 5형제가 가족을 이끌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신화동에 터전을 잡고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차츰 살림이 늘고 여유가 생겨 1936년에 다섯 형제가 소 두 마리를 판 돈으로 원래 살던 곳인 함경북도 명천군을 찾아가서 이 두 권의 족보를 만들어 온 거란다.”


“소 두 마리씩이나 판 돈을요?”


시골에서는 ‘지아비 없이는 살아도 소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있다. 못살아도 밭갈이철에는 평소 먹기 어려운 찰떡을 치거나 콩을 삶아서 소에게 먹일 정도로 애지중지 하는 게 소였는데 그걸 두 마리나 팔아서 고작 책 두 권으로 바꿔왔단 말에 당시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세상에 뿌리 없는 나무는 없느니라. 족보 책은 비록 가벼워도 거기엔 우리 가문의 조상으로부터 몇백 년을 내려온 역사와 혈맥 관계를 적어놓은 것이다. 이를 모르면 서로 가까이 있어도 남과 남인데 어떻게 대대손손 화목하게 잘살겠느냐. 인정 관계는 돈을 주고도 못 바꾼다”며 옛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우리 시조 천만리는 원래 중국 명나라 사람으로 무과 장원에 급제하여 군정관리직을 지냈는데 1592년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자 조선 이씨 왕조의 구원 요청으로 조병령양사겸총독장(調兵領糧使兼總督將)이라는 중임을 떠맡고 2만 명의 명나라 철기병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후 성, 곽산, 동래 세 곳 전역에서 삼전 전승이라는 전과를 올리며 왜적을 소멸하는 큰 공을 세워 조선 국왕으로부터 화산군으로 봉해지고 충장공이란 위패를 내려 받았다. 그의 아들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라는 벼슬을 하사받은 뒤 조선에 남아 귀화하였는데 우리가 바로 그 후손들이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이 민족 역사에 영광을 빛냈다는 이야기에 당시 어렸지만 너무도 자랑스럽고 가슴이 뿌듯해져 적혀 있는 족보책이 더없이 돋보이고 소중한 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60년대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낡은 것을 부수고 새 것을 세운다’며 집집마다 낡은 책들을 소각하고 조직에 바치느라 야단일 때 족보도 불태워질 것을 나의 결사 반대로 지켜낼 수 있었다. 나는 아예 책 두 권을 비닐로 꽁꽁 싸서 누구도 모르게 헛간에 감추어 두었다가 몇 해 뒤 잠잠해지자 꺼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렇게 가문의 보물을 살려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수고천장(樹高千丈)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는 중국 속담이 있다. 아무리 큰 나무라 하더라도 결국 낙엽이 되어 거름이 된다는 뜻으로 인생도 때가 되면 자연히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 세상사 이치라는데 그래서인지 나도 환갑을 넘기고 보니 그 뿌리를 찾고 싶은 생각이 더욱 짙어진다.


언젠가는 조상들의 삶의 옛터를 찾아 시조 영전에 술잔에 술을 붓고 인사를 올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족보에 적혀 있는 조상들의 원적지인 함경북도 명천군을 찾아갈 타산으로 여러 해째 이모저모 애써봤다. 두만강을 사이 두고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라서 쉬울 줄로 여겼는데 북한에 가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아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컴퓨터를 익혀 인터넷으로 한국 천씨 종친회 사이트에 들어가 보게 됐다. 한국에도 많은 후손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됐고 가문의 지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소식에 가슴이 한결 뿌듯했다. 더욱이 전북 남원시 금지면 방촌리에 시조 충장공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서원이 있으며 방촌동에 시조의 묘지까지 있다는 사실에 숙원을 풀 수 있다며 기뻐했다.


2012년 8월에 한국 방문 기회가 있어 나는 작은 딸을 데리고 서울로 간 김에 소원을 풀고 싶어 짐 속에 족보 책을 챙겨 갖고 떠났다.


방한 중에 서울 마포구 도화동의 종친회 사무실을 찾아가 천석기 사무국장에게 가져온 족보책을 보여주니 “중국에도 이런 족보가 있는가?”라고 놀라면서 중국에서 사는 천씨 가족이 이렇게 찾아오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각기 족보책을 펼쳐놓고 남과 북의 족보책에 쓰인 내용을 대조하였는데 시조에 관한 서술과 앞부분은 대체로 비슷했지만 그 뒤 세대부터는 두 족보가 이어 내려온 기재가 달랐다. 천씨는 본이 하나라서 언제나 한 집안이라 했는데 족보마저도 서로 제 갈래대로 적었으니 큰 실망이고 유감이었다.


나는 천 국장에게 우리 시조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적들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지만 얼마 후 중국에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그 군대가 조선에 와서 명나라 사람이라면 모조리 잡아 죽이는 통에 추적을 피해 함북 명천의 깊은 산골에 피란해 외부와 연계를 끊고 살았다는데 어떻게 전북 남원에 묘지가 있는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 물음에 그 분은 사실 남원에 있는 것은 예전부터 이름 모를 천 장군이라는 묘지가 있는 것을 시조의 무덤이라고 추측한 것이지 사실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족보에 적혀 있는 대로 금강산 정양사에 찾아가면 혹시 그 실마리를 풀 가능성도 있다며 왕래가 자유로운 조선족이니 찾아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우리가 금강산에 가면 마치 자유롭게 행동하며 탐방할 수 있는 줄로 알고 믿어주며 하시는 그 분의 부탁에 나는 그저 ‘허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원의 시조 묘지 탐방을 취소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수백 년 전 시조께서는 인심 좋고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을 떠나기 아쉬워 이 고장에 뿌리를 내렸다. 후손들에게 대대손손 화목하게 잘살아가라고 터전을 마련해 주었는데 어찌하여 지금 사람들은 저희들의 마당에 금을 그어 놓고 니 것 내 것 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싸우고 싶어하는지 통 이해가 안 간다.


족보를 보존하는 것은 종법을 이어가고 조상을 존경하며 인정을 가까이하고 후손에게 멀리 전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우리의 족보도 머지않은 장래에 남과 북의 혈맥을 하나로 통합한 새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날 것이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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