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는 내물왕릉이나 무열왕릉처럼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왕릉과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처럼 주인을 알 수 없는 왕릉급 무덤이 곳곳에 자리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전성기 서라벌(경주의 옛 이름)에는 17만 8천936호가 있었다고 하니 현존하는 무덤의 수는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8~9세기 서라벌은 인구가 100만 명에 육박하고 모든 가옥을 기와로 지어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고 한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보면 신라의 왕은 금관을 쓰고 허리에 금띠를 맸다. 또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을 차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었다. 금으로 만든 관, 반지, 팔찌, 귀고리, 목걸이, 신발 등은 5세기부터 6세기 전반의 왕릉과 왕릉급 무덤에서 집중 출토됐다. 금관만 6개가 나왔다.
경주에는 한국 씨족마을의 원형인 ‘양동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1984년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됐고, 2010년에는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돋움했다. 씨족마을의 구성 요소인 종택, 살림집, 정자, 서원, 서당 등 유형유산과 유교 예법에 따른 의례, 전통 놀이 등 무형유산이 전해진다. 국보 1점, 보물 4점, 중요민속자료 12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점 등 국가와 시도 지정 문화재만 22점이 있다.
양동마을의 두 축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다. 두 집안은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 손중돈, 영남 사림파의 거목인 회재 이언적, 임진왜란 때 의병장 손엽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경주는 해가 지면 신라 시대의 서라벌로 다시 태어난다. 서라벌의 영화를 말해 주는 유적들이 그윽한 달빛 아래 기지개를 켠다. 서라벌은 전성기 때 당나라의 장안,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비견되는 국제도시였다. 날이 저문 후 동궁(東宮) 월지(月池), 첨성대(瞻星臺), 대릉원 등이 모여 있는 경주 역사유적지구를 걸어보면 서라벌의 정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동궁은 신라 태자가 살던 별궁이며 월지는 동궁 내 연못이다. 신라인들은 월지 남서쪽 호안은 직선으로, 북동쪽 호안은 복잡한 곡선으로 설계해 연못가 어디에서도 전경(全景)을 파악하기 힘들게 했다. 비록 작은 인공호수지만 바다를 마주한 듯한 느낌이 나도록 구획한 것이다.
첨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자 신라 27대 임금인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 왕궁 앞에 세운 석조 건축물이다. 음력으로 1년(362일)을 의미하는 총 362개의 돌로 쌓아 올렸는데 숱한 벼락과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1천400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냈다.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