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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의 모 식당에서는 스탈린의 폭압적인 고려인 강제이주를 온몸으로 기억하는 산 증인 중의 한 명인 정상진(鄭尙進·95) 선생의 90세 생일을 축하는 파티가 조촐하게 열렸다.


고려일보 한글판 편집장을 역임했던 김성조 선생을 비롯하여 고려인 동포 10여 명이 그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마련한 자리였다.


이날 아내와 함께 참석했던 기자는 격동의 20세기, 우리 역사의 산 증인이시자 인류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잔인했던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경험하신 정상진 선생의 삶의 한 구절이라도 놓치지 않고 기록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연로해진 정상진 선생이 딸이 사는 모스크바로 가시겠다고 결정함으로써 나의 이 다짐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 후 매년 계절의 여왕 5월이 돌아오면 그분을 떠올리면서 그분이 알마티에 사실 때 그의 삶의 얘기들을 충분히 듣지 못했던 나의 게으름을 한탄하곤 했다.


올해는 그분이 95세가 되는 해이다. 물론 따님이 정성껏 아버지의 생일상을 차렸겠지만 기자는 그분의 삶의 한 자락이라도 엿볼 수 있는 글을 쓰면서 그분의 95세 생신을 축하하고자 한다. 더불어 “내 마지막 꿈은 조국의 통일을 보는 것”이라면서 한국과 고려인 청년들이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평소 강조하신 그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한다.


그는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던 조선 사범대 2학년 때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를 맞게 된다. 제빵사였던 정상진 선생의 아버지를 포함해서 2천500여 명의 민족지도자들은 지난밤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17만여 동포들은 누렇게 익은 벌판의 곡식과 마당에서 모이를 주워 먹는 닭 한 마리에도 손대지 못한 채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정상진 선생은 당시를 “몇몇 운 좋은 가족들은 객차를 타고 이주를 당했지만,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화차를 타고 짐승처럼 중앙아시아로 끌려왔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후 그는 끄즐오르다로 자리를 옮긴 조선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카자흐스탄 쉬콜라(초·중·고교)에서 러시아문학을 가르치면서 교편생활을 하게 된다.


우리 민족에게 씌워졌던 ‘불순민족’이라는 멍에는 피 끓는 청년 정상진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몇 년 뒤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유럽 전선, 일본제국주의자들과의 동아시아 전선에 걸쳐서 엄청난 인명피해와 초반 열세를 만회하고 1945년 5월 9일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때부터 소련군은 시베리아와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일제 관동군과의 전투에 전력을 집중하였다.


이 시기 소련은 한반도 진격 작전수행과 종전 후 일제가 사라진 조선에서 소련의 정치적 영향력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정치공작대를 조직하게 된다.


1937년 강제 이주 후 중앙아시아에서 새롭게 터전을 일구어 가던 고려인 중 일부는 이때 KGB의 갑작스러운 호출로 러시아 땅으로 불려가서 한반도 정세에 대한 교육과 함께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그 후 일제 치하의 조국으로 보내진다. 어떤 이들은 한복을 입고 서울과 평양 부산지역뿐만 아니라 시골 산골까지 들어가서 일본인 동향과 사회민심을 살피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조선 진공 작전에 실제로 투입되는 소련군의 통역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정산진 선생은 소련군 해병대의 일원으로서 오로지 ‘조선해방전투’에 참가한다는 그 감동을 가슴에 품고 함경북도 웅기, 나진, 청진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정상진 선생은 “그 강력하던 관동군이 소련군의 공세에 제대로 된 반격 한번 하지 못한 채 힘없이 후퇴하던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을 때와 우리 부모가 등졌던 고향 땅을 다시 밟는 순간,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얘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그 후 그는 북한 정권수립을 도우라는 소련 당국의 지시에 의해 평양으로 이주하여 불철주야로 일하였다. 그 공로로 북한의 문화선전성 제1부상(우리의 교과부 차관에 해당)까지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1957년 북한의 ‘반소’정책에 의해 10여 년간의 조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왔다. 카자흐스탄에 돌아온 그는 재소련 한인 신문인 레닌 기치 신문(현 고려일보)의 기자로 30여 년간 근무했다. 특히, 은퇴 후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그는 고려일보의 열성 독자로서 왕성한 투고활동을 통해 고려일보의 발행을 도왔다.


한-소 수교와 함께 물밀듯이 진출한 한국기업에 우리말과 러시아어에 능통했던 고려일보 기자들이 통역으로 대거 진출함으로써 신문을 제작할 기자들이 절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동포애, 조국애가 나이를 잊게 하는 듯했다.


그의 조국 사랑은 2004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이 주최한 동포 간담회에서 빛을 발했다.


“고려인 동포들이 이렇게 잘 살고 계신 줄 미처 몰랐다. 이렇게 잘 살고 계시는 줄 알았으면 진작 왔을 텐데…. ”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말에 답하면서 그는 “우리들의 자녀, 청년세대들은 모국어도 잊었고 강제이주도 잘 알지 못한다”면서 “우리 말과 글 그리고 문화를 계승할 수 있도록 조국에서 지원해 주면 좋겠다”고 부탁하셨다. 그의 이 부탁은 노 대통령에 의해 이후 한글학교와 고려인지원 특별법의 제정으로 이어져 고려인 동포사회를 도울 수 있는 근거가 된 것으로 기억된다.


또 한편으론 “내 부모가 비록 무식쟁일지라도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 것처럼 내 조국이 비록 남북이 분단되어 서로 싸우고 있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내 마지막 꿈은 조국의 통일을 보는 것”이라던 그분이 말씀이 아직도 내 귓가에 남아 있다.


실로, 정상진 선생은 20세기 한민족 시련의 역사, 영광의 순간마다 함께 했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해방의 기쁨, 북한 정권수립과 한국전쟁 그리고 역사적인 한-소 수교와 소련의 붕괴 과정을 온몸으로 겪으며 오로지 ‘한민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이라는 한길로만 걸어왔다. 그러나 작년까지만 해도 젊은이 못지않게 정정하셨던 정상진 선생은 95세 생신을 얼마 앞두고서 기력이 많이 떨어져서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와 기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정상진 선생님, “95세 생신을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합니다. 당신은 우리 역사 앞에 충분히 열심히 사셨습니다. 이제 당신의 꿈을 위해 후배들이 미력하나마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늘 건강하소서.”


김상욱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상무위원, 한인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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